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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 청사진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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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6 10:11

<2022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일반부 수상작>
 

 

포스트휴먼에 대한 상상들은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포스트휴먼이란 인간 이후의 무언가 혹은 인간을 뛰어넘는 무언가를 의미한다. 우리는 인간이기 전에 존재이며 존재의 역사는 유구하다. 이전의 존재들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 흔적으로만 남았다는 사실은 인간 또한 그러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바야흐로 ‘무언가’의 시대가 개막하면 인간은 화석 박물관에 전시된 하나의 종, 또는 엉성하게 모델링 된 연구 자료로 취급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포스트휴먼에게 순순히 바통을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업데이트를 거치며 살아남을 것인가.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는 포스트휴먼 담론에 있어 많은 시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포스트휴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인간을 공격하는 로봇을 떠올리며 무작정 공포감에 젖는 사람들을 우선 멈춰 세운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멸하는 세상을 가정한 뒤 생존 방법을 모색하는 다소 뻔하고 공상적인 것이 아니다. 책의 목적은 포스트휴먼에 앞서 인간 본질에 대해 고민하고, 포스트휴먼 현상을 이해하여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꽤 오래 살아남은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디스토피아적 가설 설정보다 다채로운 가능성을 바탕으로 한 재정비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만이 성장을 위한 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포스트휴먼에 대한 고찰을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보며 더 나은 세상을 준비해야만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거울일 필요가 없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은 대표적인 포스트휴먼 현상이다. 인간 이후의 시대를 열 존재로 가장 유력한 후보군인 인공지능은 현재 발 빠르게 진화 중이다. 구글의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고가 바둑 기사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서 4 대 1 압승을 거두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사건도 벌써 6년 전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지능을 이미 오래전에 능가했다는 평이 주류다. ‘그래봤자 인간이 만든’이라는 수식어는 인공지능의 역사가 인간의 설계로 비롯되었다는 점에선 적절할지 모르지만, 인공지능의 궁극적인 목표가 스스로 수정하고 개선 해내는 ‘초지능’을 갖추는 것에 있다는 점에선 그렇지 못하다. 머지않아 인공지능이 인간의 범주를 완전히 벗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지구 최상위 포식자인 우리는 이 사실에 커다란 공포를 느끼지만, 이러한 감정과 대상에 대한 인정은 별개의 영역인 듯하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일정 부분에 있어 여전히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인공지능의 능력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는 것인가.  

이는 인공지능의 사유능력 결여로 설명된다. 인공지능은 수행에 있어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가지지만 인간지능과 사뭇 다르다. 의식적 경험을 통해 사고하고 판단을 내리는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은 자의식이 결여된 채 오직 인간이 프로그래밍한대로, 입력 값에 따라 행동한다. 학습 역시 노드 값을 반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주체적인 행위로 보기 힘들다. 한 마디로 사유하지 못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간다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이러한 깐깐함은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에게 더욱 각박하다. 이 책에서는 렘브란트 프로젝트를 예로 들고 있다. 프로젝트에서 인공지능은 전설의 화가 렘브란트의 수많은 그림을 분석한 뒤 특징을 찾아낸다. 그리고 데이터를 기반으로 꾸준히 학습하여 렘브란트의 화풍을 구현한다. 마치 그가 그렸을 법하게, 화가의 신작이 세상에 나온 것처럼. 이외에도 문학 작품을 쓰고 작곡도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 유능한 인공지능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무엇보다 인간적인 결과물, 혹은 그보다 더 뛰어난 결과물을 만들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다운 방식, 자각과 수행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았다며 인간으로부터 외면당한다. 과연 인간다움은 훌륭함을 판단하는 잣대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설정한 인간다움의 틀에 부합하는 존재인가.  

현대 사회에서 “나도 사람답게 좀 살고 싶다”는 넋두리를 듣기는 쉽다. 이때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인간 복지의 측면에서 해석된다. 철학적 사유나 주체성의 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의식주가 해결되고 삶의 질이 어느 정도 보장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끼리의 ‘인간답게’는 별다른 의식 수준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사유하는 능력은 정도를 달리하기 때문에 개중에 사유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엄성을 침해받거나 가치를 폄하 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공지능에게는 한없이 각박했던 것과 달리 인간에게 적용되는 기준은 너그럽기 그지없다.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에게 인간성의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현재의 우리부터 돌아보아야 한다. 인간과 차별화되는 존재들이 휴머니즘적 사고에 부합할 이유는 없다. 이 책에 따르면 인공지능은 곧 ‘낯선 지능’이다. 인간지능과 인공지능 모두 온 우주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능 중 하나이며, 인공지능은 그저 인간에게 낯선 지능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지능과 닮지 않았다. 산출되는 결과물만 비슷할 뿐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지능과 닮을 필요는 더더욱 없다. 우리와 다른, 낯선 존재임을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적절한 기준을 다시 세워야 한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거울일 필요가 없다.  

진짜 위기는 다른 곳에 있다 

 앞서 말했듯 기술의 발달이 앞당긴 포스트휴먼의 시대는 인간에게 막연한 공포다. 로봇의 반란, 로봇이 지배하는 세계, 노예가 된 인간들을 상상하면 그보다 두려운 것이 없다. 지배 세력의 교체는 곧 인간의 위기이며, 멀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것으로 예측된다. 하지만 생각보다 위기는 이 같은 공상 보다 제법 가까운 곳에서, 천천히,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인간과 똑 닮은 로봇들이 아니다. 바로 고도로 디지털화된 사회 가운데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이다. 이 책에 따르면 디지털 기술은 기본적으로 인터넷 경제 3원칙 중 하나인 ‘무어의 법칙’을 따른다. 마이크로칩의 뛰어난 성능 덕분에 컴퓨터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속도와 양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것을 더 빠른 속도로 알게 도왔고 인간은 이전보다 효율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은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큰 공을 세웠다. 덕분에 우리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보다 철저히 감시할 수 있게 되었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즉시 폭로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은 단순히 인간의 편리성을 증진한 것 이상으로 가치 있는 삶을 누리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을 마냥 긍정적으로 보기는 힘들다. 보이지 않는 그늘은 언제나 존재한다. 바로 기술의 발달이 불러온 사유의 상실이다. 

추천 알고리즘의 발달은 인간 사유의 상실을 잘 보여준다. 추천 알고리즘이란 사용자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해주는 기술이다. 한 콘텐츠를 추천할 때, 사용자 기록을 추적하여 과거 선택했던 콘텐츠 중 높은 만족도를 보였던 콘텐츠를 찾은 뒤 이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콘텐츠를 추천하거나, 비슷한 성향을 가졌다고 인식된 사용자끼리 같은 군으로 묶어서 서로에게 서로의 이전 관심 콘텐츠 내역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인터넷은 굳이 탐색하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전에 우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보따리에 가득 담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떠먹여 주기 식’이 손에는 달지만 뇌에는 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알고리즘은 공정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알고리즘이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해서 편향성을 가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알고리즘은 알고 보면 편견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보스턴 대학교 법학 교수 대니엘 시트론에 따르면, 알고리즘을 설계한 것도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편견과 주관적 관념이 내포될 수 있다. 개발자의 성향과 가치관으로부터 알고리즘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한 콘텐츠가 대체로 자신의 관심사와 비슷하므로 이 부분에 대해 크게 유념하지 않는다. 이 콘텐츠가 정확히 어떤 원리로, 어떤 법칙으로 나에게 추천되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러므로 그 과정에서 교묘하게 조작을 가해도 우리는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만약 추천 알고리즘이 완전히 공정하고 중립적이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발생한다. 나의 신념이나 취향에 딱 들어맞는 틀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면 편향적인 시각은 보완의 여지도 없이 그대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반대편에서 혹은 제3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기가 어렵게 되고 만다. 자신의 견해를 대변하는 사람끼리만 소통하고 화합하여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강한 결속력으로 이외 집단의 의견을 듣지도 않게 된다면 이는 곧 사회 양극화의 발생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알고리즘에 과하게 의존할 때, 생각하는 힘을 잃은 우리를 마주한다. 문제의식이 흐려지고 다채롭게 사고하는 법을 잊어버린 이들은 텅 빈 깡통과 같다.  

포스트의 주인은 누구인가 

 사유 능력이 병들어 버린 인간은 방대한 양의 정보들이 가진 가치를 제대로 분별하기 어렵다. 쏟아지는 뉴스 중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 밝힐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저 무방비 상태로 왜곡되고 조작된 기사들에 선동당할 뿐이다. 인간은 여태 인공지능이 스스로 사유할 수 없음을 비판해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인간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알파고와 닮았다. 오히려 알파고보다 수행에 있어 효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고장 난 알파고’라는 말이 적절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인공지능, 또는 더 경쟁력 있는 누군가에게 자리를 넘겨주어야 하는가. 속단하긴 이르지만, 아직은 아니다. 인공지능 연구가 인간의 도움 없이도 기능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인간을 필요로 하는 것은 여전하다. 아무리 뛰어난 인공지능이라고 한들 원리와 규칙, 일정량 이상의 데이터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 오류 가능성이 있지만 인공지능은 인간과 달리 스스로 극복할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오류의 개선, 나아가 성장을 위해 반성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인데 인공지능의 반성이란 그저 차곡차곡 쌓아온 데이터의 검토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에 진정한 반성으로 보기 힘들다. 

결국 인간은 인공지능의 최초 고안 단계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을 간섭해야 한다. 스무 살이 되면 으레 독립하는 인간과 달리, 인공지능은 별다른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홀로 설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 더 넓게는 기술의 발달이 우리의 지위를 위협할까 걱정하고 경계하기보다 시대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의 고도화는 곧 인간 능력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력의 성과를 기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로봇을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과 똑같이 만들려는 노력을 멈추고, 로봇을 계기로 스스로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 정보 기술의 발달 속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생존해야 하는지, 인간이 존재하는 미래가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그 물음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인간이 가진 반성 능력은 그 어떤 기술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다. 반성을 토대로 존재에 대한 고찰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포스트의 주인은 누구인가. 존재의 미래를 존재가 정확히 예측하긴 어렵겠지만, 그럼에도 생존하는 종이 하나로 결정되지 않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인간과 인공지능을 비교했을 때도 특화된 부분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역량은 주체가 누구인지에 따라 분야별로 차이를 보인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가지고 있는 기량을 발휘한다면, 후에 있을 생존 경쟁에서 패배자는 없을지 모른다.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를 탈피하고 이해를 기반으로 여러 개체와 함께 상호 협력할 때 이야기는 제법 희망적으로 진행된다. 소외와 단절이 만연한 현대 개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존재들이 더불어 나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일 미래는 더욱 풍요로 가득할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이 모여 만들어 낼 시너지 효과는 생각보다 대단하다. 오늘날 인공지능이 비록 인간과 깊은 정신적 유대는 아닐지라도 ‘시리’, ‘빅스비’라는 이름으로 집 안 거실에서 활력과 온기를 전해주는 것은 이들의 공존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탐구와 성찰을 기반으로 타자와의 경계를 허물고, 미래 설계를 설계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포스트휴먼은 결코 인간의 위기로 분류될 수 없다. 오히려 청사진에 가깝다. 포스트휴먼 담론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기회이며, 혁신의 출발점이다.  

필자: 신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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