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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인문학의 설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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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2 16:48

1. 인공지능은 무지개색 고무줄 개념

  작년 모 기업데이터연구소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 가전 브랜드 중 ‘LG’를 가장 선호한다. 이 조사는 '네이버 쇼핑 랭킹 순 톱 300'에 해당하는 12개 품목군 3600 개 제품 중 LG전자 제품이 586개로 가장 많았다고 밝혔다. 3대 가전제품인 TV, 세탁기, 냉장고 중 TV는 삼성전자의 제품이, 세탁기와 냉장고는 LG전자의 제품이 각각 1위를 차지하였다. 한편 또 다른 단체에서는 연령대별 가전제품 브랜드 선호도를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특히 50, 60대가 LG전자의 제품을 선호했다. 50, 60대가 LG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브랜드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한다. LG의 옛 이름 “금성”을 경험한 이들은 LG를 신뢰한다. LG전자는 최근 “공간에 감각을 더하는 디자인”이라는 문구와 함께 가전 제품을 오브제(objet)로 네이밍하기 시작했다. 오브제로서의 가전은 공간의 분위기를 새롭게 하는 가구가 되고 나아가 작품의 가치를 갖는다. 

  LG 냉장고의 현재가 16가지 색을 자유롭게 배열할 수 있는 ‘오브제’라면, 그 옛날 금성의 모토는 ‘인공지능’이었다. 오브제 세탁기도 당연히 인공지능 세탁기이다. 오브제는 “투입한 세탁물의 무게, 습도, 재질을 분석해 옷감을 보호하는 최적의 모션”을 수행한다. 인공지능 시대인 지금, LG는 인공지능에 공감지능이라는 이름을 덧입혔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는 그리 놀랍지 않다. 

  우리나라의 냉장고 광고 역사에서 최초의 인공지능 냉장고 광고는 1991년 금성 OK 세탁기 광고이다. 이 광고에는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큰 글씨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것이 인공지능인 이유는 “기름 범벅이 된 옷, 목깃이 시커멓게 된 와이셔츠를 세탁기 속에 집어넣”어도 “수량 조절, 세제량 조절, 시간 조절 스위치를 어떻게 작동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필요”가 없이 단 하나의 스위치만 누르면 되기 때문이다. 지금은 너무도 당연한 이 기능, 원터치 스위치 기능이 당시에는 인공지능의 기능으로 불렸다. 한편 앞에서 살펴보았듯 여기에 몇 가지 기능을 추가하고 기술을 고도화하면 공감지능이 된다. 한번 생각해 보라! 지금은 생성형 인공지능 시대이다. 단어 몇 개로 나를 대신해 나의 글을 써 주기도 하고 단어 몇 개로 나를 대신해 그림을 그려준다. 나보다 더 나 같은 사진을 만들어 주고, 실재한 적도 없고 실재할 수도 없지만, 실재보다 더 실재같은 사진과 영상도 손쉽게 만들어 준다. 사진 몇 장과 녹음된 몇 분짜리 음성으로 고인을 현세로 불러내기도 한다. 2016년 인간보다 생각을 더 잘 하는 인공지능 알파고에 놀랐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내 기분을 나보다 잘 알고, 내 음악과 영화 취향을 나보다 한발 앞서 말해주는 ‘분석’과 ‘예측’의 아바타는 내가 어딜 가든 내 주변에 상존함이 당연시 되었다. 우리는 지금 ChatGPT 3.5, 4.0 그리고 4o를 연속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5년이 지나면 ‘인공지능’은 자연스럽게 ‘생성형 인공지능’만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20년 후에는 우리가 오래전부터 상상했듯 몸을 가진 로봇을 인공지능과 동치로 여기게 될지도 모른다. 이렇듯 인공지능이 지시하는 대상은 시대와 관심에 따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자꾸 바뀐다. 인공지능은 고무줄 개념이다. 

  최근 EU에서 제정한 인공지능 법(AI ACT)에 따르면 인공지능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그것의 초안은 이를 기술로 소프트웨어로 정의했다. 한편 말의 의미로만 따진다면 인공지능은 모방 지능이다. 풀어 이야기하면 인간의 지능을 모방한 지능이 인간지능인데, ‘지능’이라는 말의 어원을 쫓아가 보면 이 지능, 즉 인간지능도 모방 지능으로 사용되었던 사례를 만나게 되기도 한다. 18세기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원본 지능(intellectus archetypus)을 신적 지성으로, 모방 지능(intellectus archetypus)으로 칭했다. ‘인공지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외연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의미도 달라진다. 인공지능은 무지개색 고무줄 개념이다. 

2. 인공지능 시대, 인문학의 자리

  사람이 만든 것, 사람과 관계된 것, 글로 된 것, 글과 관계한 것은 모두 인문학(人文學)의 탐구 대상이다. 그러고 보면 인문학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성의 분화기 근대를 거치며 학문 그 자체로서의 철학은 다양한 개별과학을 품 안에서 풀어내었고 이때 독립한 개별과학은 지금도 세포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전문가는 가장 작은 세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뉴튼 이후 ‘분석’과 ‘종합’은 학문 방법론의 공식이 되었다. 가장 작은 단위로 쪼개어 연구자가 설계한 가설에 따라 이성의 지도하에 종합하는 것, 우리는 지금도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

  세계 내 모든 것에 관심의 촉수를 뻗는 인문학에게 지금의 시대정신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은 가장 탐스러운 탐구 대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문학은 이와 관련한 무엇을, 또 이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최근 상용화되고 있는 인공지능 AR/VR 장례서비스를 고도화하는 연구를 한다고 해보자. 고인의 데이터 하나를 분석하고 이를 다시 종합하여 구현하고 성능을 측정하는 연구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특정 인공지능 기술을 연구하는 공학, 이를 활용하여 사회를 분석하고 결괏값을 내놓는 사회과학과는 달리, 인문학은 말과 글에 대한 분석과 종합을 고유의 방법론으로 하기에 통상 우리가 생각하는 인공지능 연구를 할 수는 없다. 우선 글로 된 것을 분석하려면 개념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개념화된 것들을 논리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시계열적으로는 종합을 하고 이를 다시 글로 표현해야 할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인공지능은 무지개색 고무줄 개념이다. 원터치 세탁기도 인공지능이고, 로봇도 인공지능이다. 알고리즘도 인공지능이고 하드웨어도 인공지능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문학에게 있어 인공지능은 동경의 대상일 뿐 결코 접근할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관점과 관심을 인공지능 자체에서 인공지능이 놓인 관계의 범주로 옮긴다면 인문학의 탐구 지평은 열린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사회, 자연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거꾸로 말해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하고 등장하는 인공지능은 왜 그러한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럴 때 그와 관계하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세계는 어떠한 모습을 갖게 되는가?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 현상의 인과 계열에 대한 수평적 탐구가 공학과 사회과학의 소임이라면 현상과 그 아래 놓인 본질을 가로지르는 수직적 탐구가 인문학의 역할이라 할 수 있다. 보이는 바 현상의 표층 아래 용광로와 같이 이글거리는 본질의 의미를 끄집어 내어 열어 밝혀 분출시키는 것이 인문학이 가진 힘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전범 재판소에서 유대인 학살의 죄명으로 재판장에 선 아이히만의 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 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성 안에 내재한 ‘악의 평범성’을 발견해 낸다. 잘 알려져 있듯 아이히만은 칸트가 말한 도덕법칙과 이에 복종하는 실천이성을 평소 존경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나치의 명령을 자신의 행위의 준칙으로 삼아 이를 충실히 실천하였다. 아이히만 재판 과정을 지켜 본 그녀의 관심의 종착지는 당시 법체계에 대한 분석, 인륜적 호소에 반응하지 못하는 아이히만의 심리 매커니즘에 대한 규정 등이 아니었다. 이이히만 재판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현상을 통해 발견한 것은 그 기저에 놓여 있는 평범한 인간의 보편적 본질이다. 다시 말해 칸트가 촉구한 이성을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용기는 커녕 그 기능마저 상실하여 악이 악인지 분별할 수도 없는 ‘생각의 무능’ 상태에 빠지게 되는 성향은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 소질이라는 것이다. 엄밀한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불성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의 전형이지만, 인문학적 상상력은 이를 본질을 직관하는 힘으로 규정한다. 특수로부터 보편을 추론할 수 있는 힘인 반성적 판단력은 하나를 보고 열을 아는 원리를 직관하는 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힘이다. 재차 언급하지만 그녀가 발견한 ‘악의 평범성’은 하나의 관점에서는 주관적 뇌피셜에 따른 비과학적, 비학문적 썰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다른 관점을 취하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식의 차폐물 속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우리 삶의 참모습으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인문학적 상상력의 발휘는 보편과 특수의 동근원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1991년 OK 세탁기를 규정하는 인공지능, 2024년 오브제 감성지능을 규정하는 인공지능, EU가 규정하는 시스템으로서의 인공지능, 어느 교수가 ‘인공지능 윤리와 공정성’ 수업 에서 언급한 인공지능은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본 고의 주제인 ‘인공지능 시대’의 관점으로 수렴하여 볼 때, 이 의미의 다름이 ‘인공지능 개념 성립불가론’과 같은 회의주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인공지능’ 그 자체가 가지는 힘의 본질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가능하게 한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솟구쳐 나타나는 인공지능들은 인간이 고안해 낸 추상명사 ‘인공지능’에 기인하였지만 이내 다시 그 아래로 돌아온다. 개별 인공지능 기술들을 미시적으로 탐구하는 일에 인문학은 무능하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 그것들이 놓여 있는 ‘인공지능 시대’ 속 기술과 인간에 대한 관계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을 위한 최적의 통로는 인문학적 통찰이 아닌가 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의 자리’는 여전히 있다. 그리고 자리는 그대로 그 자리이다.

3. 인공지능 시대, 인문학의 설 자리

  그렇다면 인문학에는 어떤 사유체계가 있길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상상력을 통한 본질 직관을 가능하게 할까? 바다에 앉아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 보자. 방금 내 앞으로 밀려온 파도는 방금전에 밀려왔던 파도와는 다른 파도이다. 그런데 그 모습들이 어떠하였든 그 파도들은 다시 바다속으로 돌아가 바다가 된다. 파도는 바다에서 나왔으며 다시 바다가 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다와 파도는 하나이다. 오래전 동양 사상은 바다와 같은 것을 체(體), 파도와 같은 것을 용(用)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였다. 체는 본체, 본질, 실체를 의미하고 용은 작용, 현상을 의미한다. 시시각각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는 파도는 사실 바다 그 자체이고 파도를 잉태하고 산출하는 바다는 어느 시각 우리 앞에 파도로 다가온다. 파도는 바다고 바다는 파도다. 체용일치(體用一致), 체는 곧 용이고, 용은 곧 체이다. 이러한 사고패턴은 서양 사상에서도 발견되는데, 여기서는 ‘신 즉 자연’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서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에 따르면 신이 있고, 그리고 자연이 있다. 한편 그 교리는 동시에 자연 안에 신이 있고 신안에 자연이 있다고도 가르친다. “신은 포도나무고 피조물인 인간은 가지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다”(요한복음 15장 5절). 창조자 신은 자연을 만든다. 그러나 신은 자연을 자신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 자신의 밖에 티끌이라도 존재하게 된다면 신의 무한성에는 테두리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본질인 무한성에 난 생채기는 신을 더 이상 신이 아닌 그저 그런 하나의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신은 자기의 모습을 자연으로 드러낸다. 파문당한 자유사상가 스피노자(Spinoza)는 ‘자연은 신이고 신은 자연이다’라고 말한다.

  인문 정신은 순환 정신이다. 본질로부터 현상으로, 다시 현상에서 본질로 순환한다. 기초에서 실용, 실용에서 다시 기초로 순환한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의 설 자리는 따로 없다. 움직여야하기 때문이다.  

4. 인공지능 시대, 부지런한 인문학을 위하여

   인문학 위기 담론은 새롭지 않다. 인공지능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에도 인문학과의 대학 이탈 현상은 꾸준히 가속화되었고 취업 현장에서는 ‘문송합니다’라는 말로 인문학이 처한 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지 오래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시작되면서 인문학의 위기가 더 가속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사람의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예술적 창작을 하는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의 일을 하는 존재의 등장은 창의성이라는 인간의 고유성을 위협하고 이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수호하는 인문학 경시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는 일견 타당해 보이지만 그 인과관계가 명확히 검증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즉각 긍정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생성형 인공지능의 범용적 사용은 인문학뿐 아니라 모든 학문 분야의 구조적 변화를 촉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업에서 인공지능 대학원 학생이 대형언어모델(LLM)이 가장 먼저 위협할 연구 분야와 직종은 지금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인공지능 분야일 것이라 말했던 것이 인상 깊다. 그 학생은 인공지능은 인공지능 연구자보다 인공지능 연구를 더 잘하기 때문이라 가끔 자괴감이 든다고 토로했다.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음성합성 (TTS) 기술 기반 인공지능 성우가 게임, 방송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인간 성우의 역할이 기하급수적으로 축소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인공지능 성우를 다루는 프로그래머의 몸값을 높였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다시 인간 성우들을 본업으로 복귀시키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인공지능의 발달이 인문학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인지는 불확실하다. 대학의 무학과 입학 정원 의무화 움직임이 인문학과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고 결과적으로 순수학문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이러한 현상과 생성형 인공지능 확산 현상이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졌지만 후자가 전자를 야기하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대학 내 인문학의 축소와 경시 현상이 인문학, 다시 말해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 그 자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제도는 학문에 큰 영향을 주지만, 그것이 곧 학문 그 자체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은 신나게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시대를 덮는 거대한 어떤 것에 복속되지 않는다. 인문학은 자기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반성하여 연구 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즉 인문학이 부지런을 떨면 우리와 관계 맺고 있는 모든 것은 반성의 대상이 된다. 타자가 존재하는 한 주체는 타자가 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인공지능이 이러한 자신의 본성에 충실하다면, 오히려 새로운 지능적 존재자의 출현 기인 인공지능 시대는 인문학의 부흥기가 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문학이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다면, 그래야만 한다. 

  ‘인문학은 순수학문이다’라는 명제는 그것은 내재적 가치, 자기 목적적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유용성, 실용성과 같이 수단적 가치를 가지는 것과는 구분되며 호환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은 거대 국가에 사는 소수민족이 보호받듯 성역처럼 보호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는다. 보호를 받는 것은 권리이지만 자칫하면 이는 나태와 권태를 배태한다. 내재적 가치를 갖는 인문학은 내재하는 가치 탐구에만 집중하기 쉽다. 대표적인 예가 고전에 대한 내재적 분석과 탐구, 나아가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 해석들 간의 논쟁에 대한 코멘트 등일 것이다. 왜냐하면 내재적 탐구는 끝이 없고 의미는 끊임없이 생성되며, 그 가치가 내재적 가치인 이상 이러한 탐구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자의 시선에서 보면 이러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인문학 집단은 ‘빨간 사과는 빨갛다’는 말은 항상 옳을 수밖에 없다는 것과 같은 주장들로 점철된 암중모색의 논쟁터로 간주되기 쉽다. 사실 우리가 그토록 열심히 탐구하는 인문 고전들은 대부분 당시 시대와의 대결 구도 안에서 창출된 것들이다. 계몽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의 자아론은 서양의 근대를 덮친 기계론과의 대결 구도 속에서, 계몽의 완성자 칸트의 비판철학은 뉴튼주의 물리학을 자기 체계 내로 흡수함으로써, 19세기 생 철학자 딜타이의 정신과학은 과학주의와의 줄타기를 통해, 20세기 호르크하이머의 도구적 이성비판은 기술-자본주의에 대한 본질적 반성을 통해 창출된 것들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문학도 이와 다르지 않아야 한다. 본질에 대한 탐구는 인문학의 필요조건임이 분명하다. 현상 파악을 위한 부지런함도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그것이 부지런함을 장착하면 실용적 가치 속 본질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내재적 가치를 갖는 인문학은 앞에서 강조했듯 순환의 힘을 가질 때 생명력이 있고, 존재 보존의 당위성을 넘어 필요성과 유용성을 담보할 수 있다. 

  인공지능 시대에 인문학이 할 일은 차고 넘친다. 지능의 본질에 대한 반성, 재규정, 이에 대한 비판적 담론으로부터 현재 유럽연합에서 통과된 인공지능 법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법철학적 논제, 나아가 그 법이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공정과 정의에 대한 공통감각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지와 같은 논제, 인공지능 편향성 제거가 결과적으로 사실 왜곡으로 이어질 때, 어떤 가치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할 것인지와 같은 미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시대가 인문학에 요청하는 일의 목록은 매일 업데이트가 될 정도이다. 

  인문 정신은 운동이다. 헤엄을 멈추면 죽는 상어처럼, 달리기를 거르면 우울증에 걸리는 썰매 개 허스키처럼 인문학도 그 생장점에 헝겊을 덮으면 퇴색하기 마련이다. 인공지능 시대, 부지런한 인문학을 희망한다. 

  김형주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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