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넘는 시간을 온라인 강의를 하며 지내다 보니 조금씩 정리되는 생각들이 있다. 처음엔 갑작스럽게 주어진 상황에 어떻게든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에 꽤 열심히 강의 준비를 하고 녹화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었다. 어느새 타성에 젖어가던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만큼 조금은 의욕 과잉의 상태로 스스로 몰아붙였던 것도 같다. 학생이 아닌 카메라와 마주하는 상황은 낯설고 어색해서 준비를 많이 하고도 다시 촬영하는 일이 반복되기도 했다. 그렇게 1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경험이 쌓인다고 해서 실수 없이 완벽한 강의를 찍는 일도 쉽지 않지만 설사 그런 일을 이루어낸다고 해도 그것이 꼭 더 나은 강의인지는 좀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강의와 온라인으로 녹화된 강의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어떤 강의든 강의를 하는 사람이 느껴지지 않는 강의는 좋은 강의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첫 학기를 제외하고는 실시간 Zoom 강의 비중을 대폭 늘린 이유이기도 하고, 녹화를 하다 버벅대거나 애초의 계획과 다르게 딴 길로 살짝 새는 일이 발생해도 다시 녹화를 하기보다는 생방의 묘미라고 우기는 뻔뻔함을 장착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AI가 아닌 나라는 사람이 하는 강의임을 알려주는 특징은 어쩌면 이런 실수나 틈, 머뭇거림에 있는 것은 아닐까. 다소 장황하게 온라인 강의 이야기를 꺼냈지만 <세기의 대결 AI vs 인간>이라는 SBS 기획 방송을 처음 기사로 접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과 거부감도 어쩌면 이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AI 김광석, AI 김현식이라니! 청춘이라 불렸던 시절 좋아했던 뮤지션들의 상당수를 잃어야 했던 아픔이 내겐 있다. 병으로, 사고로, 또 다른 이유로 세상을 뜨거나 음악을 그만둔 내가 사랑한 뮤지션들. 그들이 남긴 LP판이나 CD를 이따금 꺼내 듣거나 때론 유튜브에서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듣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리워도 이미 지나간 그 시절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따금 꺼내어 음악이라는 이름의 추억을 소환하는 일은 내겐 분주한 일상 속에서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낙이자 사치였다. 하지만 그것이 추억이 되고 낙이 될 수 있는 것은 사실 대체불가능성 때문이다. <세기의 대결 AI vs 인간>이라는 프로그램에 소개된 ‘모창 AI’에 대해서 옹호 일색의 기사들이 쏟아졌지만 내 마음에는 이미 부정적인 반응들이 차오르고 있었다. 기사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해당 프로그램을 찾아보았다. 가장 화제가 된 <세기의 대결 AI vs 인간> 1화는 역주행의 신화를 쓴 비의 <깡>을 비가 AI 로봇들의 군무와 함께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었다. 1956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에서 인공지능(AI)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후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 속에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50년 가까이 개와 고양이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답보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이 프로그램은 인공지능의 역사에서 기억할 만한 사건을 빠르게 개관한다. 1997년 딥블루가 체스 천재를 이긴 사건, 왓슨이 TV 퀴즈쇼에서 우승한 사건, 2016년 이세돌과 알파고의 세기의 대결에서 스스로 실수를 깨달으며 진화한 알파고에게 이세돌이 패배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개와 고양이도 구별하지 못하던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발전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이제 인류는 8억 명, 5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거라는 위기감을 현실로 체감하고 있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인류의 종말을 초래할 거라는 스티븐 호킹 박사의 예언처럼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전망부터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전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균형 잡힌 시각으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보여주면서도 인공지능 문제는 철저하게 인간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인공지능에 대해 접근하고자 한 제작 의도가 엿보이지만 이후의 전개가 그에 부합했는지는 다소 의문이다. 여러 번의 학습을 통해 가수의 호흡과 창법까지 복제하는 모창 AI 개발팀을 소개하며 고 김광석의 목소리로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들려준다. 1996년에 세상을 뜬 김광석이 2002년에 세상에 나온 곡 <보고 싶다>를 부르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모창 AI를 통해 바로 그 불가능에 도전한 것이다. <옥주현 vs 모창 AI>가 ‘히든 싱어’의 방식으로 같은 곡을 나눠 부르며 누가 진짜 옥주현인지를 맞히는 퍼포먼스가 이후 이어졌고 다행히 압도적으로 진짜 옥주현을 맞힌 결과에 안도해야 했다. 패널들과 방청객들 대부분이 놀라운 기술력에 감탄을 거듭했지만 솔직한 심정은 제발 그냥 내버려 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김광석이 부르는 <보고 싶다>를 듣고 싶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좋아하는 가수의 목소리로 다른 노래들을 듣고 싶은 순수한 마음이기도 하겠으나 일종의 호기심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좋아하는 뮤지션이라 해도 1996년에 세상을 뜬 뮤지션을 그런 방식으로 소환할 수는 없다. 우리가 좋아한 것은 단지 김광석의 목소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의 특별한 목소리는 그의 음악에 실림으로써 특별한 것이 되는 것이고, 암울하던 시절을 청춘의 이름으로 함께 살아냈던 사람들의 시간과 마음이 더해져 특별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너무 빨리 세상을 등진 그와 그의 음악이 안타까워도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돌아갈 수 없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기도 하다. 고백건대 나는 김광석 목소리로 부르는 <보고 싶다>를 즐길 수가 없었다. 아니, 듣고 싶지 않았다.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다. 대체불가능한 자리를 그대로 남겨둘 줄 아는 욕망의 제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미덕일지도 모르겠다. 대체불가능의 영역을 남겨두는 것이 오히려 인간의 영역을 남겨두는 일이 될 것이다. 과학기술을 부려 온 인간의 오만함은 불가능은 없다는 신의 영역에 오랫동안 도전해 왔다. ‘인간-신’의 자리에서 내려와 동물과 식물, 사물은 물론 AI와도 공존을 모색해야 하는 포스트휴먼에게 요구되는 자질 중 하나는 대체불가능의 영역을 남겨둘 줄 아는 멈춤의 능력이 아닐까 싶다. 그것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인간의 본성을 지키며 좀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아니겠는가. 작년에 출간된 정세랑 작가의 SF 소설집 『목소리를 드릴게요』에 실린 단편 「리셋」에는 미래에서 거대 지렁이들을 내려보내 콘크리트 빌딩과 방만한 도시를 무너뜨림으로써 지구의 멸망을 늦춘 과학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거대 지렁이를 내려보내 지구를 멈추게 한 이 과학자의 마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AI 김광석, AI 김현식이라고? 아무리 유사해도 나는 그들의 노래를 듣지는 않을 것이다. 그 목소리에 내가 지나온 세월이 담길 수는 없으니까. 불가능에 도전하고 모든 것을 소유하려 들고 욕망하는 마음을 제발 멈추고 끊어내자. 제발 좀 그냥 내버려 두자. 돈 터치 미!!! 이경수(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