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현실(physical reality)가 아닌, 가상적 대상들(virtual objects)로 구성된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에서도 물리적 현실에서와 같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온세계가 멀티버스(multiverse)라는 개념 때문에 들썩이는 지금 이런 질문을 단지 한가로운 사변으로 취급할 수만은 없다. 만약 VR에서도 물리적 현실에서와 같이 의미 있는 삶이 적어도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면, 우리는 VR에서 어떤 의미가 가능할지, 그리고 그런 의미를 구현하는 VR은 어떤 것일지, 그런 VR을 어떻게 구축할지 등 많은 새로운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물론 현재 활용되고 있는 멀티버스는 우리가 사는 물리적 현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잡하지만, 그래서 감각적인 차원에서 거부감이 들고 실감도 덜하지만, 그런 부분은 앞으로 차차 해결되리라고 가정하고 생각해보자. 가상적 대상들로 가득 찬 VR은 우리가 지금 누리는 만큼의 의미를 가진 신세계가 될 수 있을까? 즉각적인 반응은 대부분 부정적일 것이다. 가상적 대상들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정교하고 실감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헛것’이고, 헛것을 가지고는 무슨 수를 써도 현실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허구(fiction)로부터는 현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의미를 얻을 수 없다는 생각, 즉 ‘헛것은 헛되다’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이 원리는 그것이 동어반복적으로 보이는 만큼 강한 직관적인 호소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헛것’이라는 표현은 ‘무의미’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헛것은 헛되다’ 원리는 경험기계(experience machine)라는 사유실험에 대한 철학자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의 판단과도 일관적이다. 노직이 말하는 경험 기계는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에서 그려지는 인간 캡슐과 유사하다. 기계에 연결될 경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설계된 경험을 할 수도, 무작위로 정해진 경험을 할 수도 있지만, 기계에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물리적 현실로의 복귀도 불가능하다. 노직은 아무도 경험기계에 연결되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우리가 뭔가를 경험하기를 열망할 뿐 아니라 그만큼 그 경험이 진짜에 관한 것이기를, 즉 헛것이 아니기를 열망한다고 주장한다. ‘헛것은 헛되다’ 원리의 배후에서도 작동하는 직관도 노직의 직관과 유사하다. 따라서 적어도 당분간은 ‘헛것은 헛되다’ 원리를 받아들여도 될 것이다. VR에서는 물리적 현실에서와 같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없다는 생각은 대략 다음과 같은 추론의 결과일 것이다. (1) 제아무리 정밀하고 교묘해도 VR은 결국 물리적 현실의 모의(simulation)다. (2) 모의는 헛것이다. 즉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3) 허구에서는 현실에서 느끼는 만큼의 의미는 나올 수 없다. 그렇다면 VR에서 물리적 현실에서와 같은 의미 있는 삶을 살 수는 없다. (1)은 VR의 개념에 따라 참이고, (3)은 앞서 말한 ‘헛것은 헛되다’ 원리다. 따라서 따져 볼 만한 것은 (2)다. 과연 물리적 현실에 대한 모의로서의 가상적 대상들, 그리고 그 대상들로 이루어진 VR은 한낱 헛것일 뿐인가?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David Chalmers)는 이와 같은 가상비실재론(virtual irrealism)에 반대하여 가상실재론(virtual realism)을 주장한다. 가상적 대상 실제로 존재하며, VR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고, VR에서의 경험은 환영이 아니며, 가상경험은 가상이 아닌 경험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는 가상적 대상들은 인간들이 지어낸 허구일 뿐이라는 가상허구주의(virtual fictionalism)에 맞서 가상적 대상들은 실재하는 디지털 대상(digital objects)이라는 가상디지털주의(virtual digitalism)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디지털 대상이란 컴퓨터의 계산 과정에 의해 구성된 데이터 구조(data structure) 또는 그런 구조들로 구성된 대상이다. 이런 종류의 디지털 대상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컴퓨터의 계산을 통해 만들어진 데이터 구조들이 헛것은 아니지 않은가? 차머스는 가상적 대상이 곧 디지털 대상과 동일함을 논증하는데, 거칠게그 핵심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VR 속 가상적 대상들은 가상공간 속에서 다른 가상적 대상들에게, 그리고 VR 사용자에게 이러저러한 인과적인 효력을 미치는데, 이 인과적 효력들은 알고 보면 전부 그에 상응하는 디지털 대상들에 의해 발휘되는 것이다. 마치 물이 알고 보면 다른 게 아니라 액체 상태의 H2O 분자들이듯이, 가상적 대상도 알고 보면 디지털 대상이다. 가상적 대상은 곧 디지털 대상인데, 디지털 대상은 실제로 존재하므로, 가상적 대상 또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상적 대상이 발휘하는 인과적 효력도 헛것이 아니라 진짜다. 일상적 상황(즉 VR 장비에 접속하지 않은 상황)에서 물리적 대상이 물리적 공간 속에서 이러저러한 인과적 효력을 발휘한다면, 우리는 그 대상이 실제로 그런 힘을 가진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상적 상황(즉 VR 장비에 접속한 상황)에서 가상적 대상이 가상공간 속에서 그러한 인과적 효력을 발휘할 때 마찬가지로 말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 가상공간 속에서 그런 힘들을 ‘실제로’ 발휘하는 것이다. H2O 분자들로 구성된 물이 물리적 공간에서 투명하고, 무색무취이며, 1기압 하에서 100도에 끓고, 우리의 갈증을 해소하는 등의 역할을 할 때, 데이터로 구성된 물은 가상적 공간에서 동일한 역할을 하고 있다. H2O 분자들로서의 물이 물리적인 속성들을 가지는 실재 대상이라면, 데이터 구조로서의 물 또한 가상적 속성들을 가지는 실재 대상이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그 어떤 것도 헛것이 아니다. VR 속 가상적 대상들도, 그들이 발휘하는 다양한 인과적 효력들도 전부 진짜인 것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 사이퍼는 붉은 육즙이 흐르는 스테이크를 씹으며 스미스 요원에게 한탄하듯 말한다. “이게 진짜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입에 넣으면 매트릭스가 내 두뇌에 맛있다는 신호를 보내주죠. 내가 9년 동안 뭘 깨달은 줄 알아요? ‘모르는 게 약이다.’ 난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부자에다가 유명해지고 싶소.” 사이퍼가 씹고 있는 스테이크는 실제로는 매트릭스의 계산 과정들로 구성된 디지털 대상이다. 바로 그 디지털 대상이 사이퍼의 뇌를 자극하여 맛있는 경험을 야기하는 것이다. 사이퍼는 이런 이유로 스테이크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차머스에 따르면 상황은 정반대다. 매트릭스 안에서 스테이크의 맛을 야기하는 것이 실제로는 디지털 대상이라면, 사이퍼가 씹고 있는 스테이크가 곧 디지털 대상인 셈이다. 물리적 현실의 물이 액체 상태의 H2O 분자들이듯이 말이다. 그 디지털 대상이 헛것이 아니라 진짜라면, 스테이크 또한 진짜다. 사이퍼가 느끼는 맛 또한 진짜다. 그 맛은 진짜 대상이 매트릭스 안에서 발휘하는 진짜 힘의 결과다. 실재하는 데이터 구조로 만들어졌으며 가상적 신체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는 스테이크를 진짜가 아니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사이퍼는 매트릭스가 헛것이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한 채 헛것은 헛되다는 결론을 피하고 의미와 가치를 누리기 위해 자기기만적인 요구를 한다. 스미스 요원에게 매트릭스가 헛것임을 자신이 알지 못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차머스의 주장이 옳다면, 매트릭스는 헛것보다는 또 하나의 진짜, 또다른 실재에 더 가깝다. 실제로 차머스는 필요와 취향에 맞게 새로운 행성들을 만들어내는 테라폼 현실(terraform reality, TR)를 말하면서, 현재의 기술적 장벽들이 해소된 미래의 VR, 즉 풍부한 VR(rich VR)에서의 삶은 얼추 TR에서의 삶만큼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TR에서의 삶은 얼추 지구에서의 삶만큼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결국 풍부한 VR에서의 삶은 얼추 지구에서의 삶만큼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물리적 현실에서 벗어나 풍부한 VR에서 살아가기를 택하는 것을 반드시 도피주의(escapism)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런 선택은 꿈의 나라로 도피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지구를 떠나 낯선 행성에 정착하는 것, 또는 먼 이국으로 이민을 가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VR이 헛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충분히 풍부해진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현실의 ‘확장’이 되지 않을까? 가상(假想)이 허상(虛想)이 아니라 실상(實相)의 확장이라면, 그 ‘실상의 늘어난 부분’ 속에서 새로운 의미나 대안적 가치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문규민(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