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창립을 선언한 인공지능 교회가 최근 해산됐다는 단신 보도가 있었다. 창립자는 구글 엔지니어 출신의 레반도프스키(A. Levandowsky), 종교명은 “미래의 길(Way of the Future)”이다. 이 신흥종교의 창립 배경과 논리는 간명했다. AI가 인간보다 ‘언젠가는’ 훨씬 똑똑해지는 시점이 올 것이며, 결국 ‘전지전능’한 기계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의 인터뷰에서 레반도프스키는 “만약 사람들에게 컴퓨터가 인간보다 더 똑똑해질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99,9퍼센트는 SF라고 답할 테지만 실상 이는 불가피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소위 ‘초 지능’의 탄생 가능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예측은 반반이다. 과학적 실현 가능성과 상관없이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 신흥종교의 출현이 마냥 황당무계하지만은 않다. 유발 하라리는 이미 2015년에 <호모 데우스>에서 ‘데이터교(Data religion)’의 출현 가능성을 지적한 바 있다. 빅데이터에 의거한 AI의 ‘현명한’ 판단이 인간의 모든 판단에 우선할 것은 자명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보다 데이터를 ‘믿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실상 이미 그런 시대의 초입에 들어섰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추천 알고리즘 같은 것들이 그렇지 않은가. 요컨대 데이터는 ‘믿음’을 준다.
그런데 ‘똑똑한’ 존재를 신뢰하는 것과 ‘신격화’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독일의 종교사가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종교의 기원을 종교적 심성에서 찾으며 원시종교와 현대종교를 구분한다. 오늘날 경전에 기초한 대부분의 현대종교는 ‘이성적 종교(rational religion)’다. 텍스트 숭배라고 해도 될 것 같다. 바이블이나 코란처럼 말이다. 오토에 따르면 원시종교는 종교적 감정, 말하자면 성스러움을 뜻하는 누멘(numen)이나 사케르(sacer)에서 출발한다. 이 ‘성스러움’의 감정은 그에 따르면 ‘이성의 언어’에서 상당히 왜곡돼 있어 라틴어 사케르가 담고 있는 복합적인 의미가 영어나 불어, 독일어에서는 누락되어 있다. 사케르는 본래 극도의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에 대한 감정을 뜻하는 트레멘둠(tremendum)에서 유래했다. 너무도 두려워 그 앞에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떠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대상이 트레멘두스(tremendus)한 존재다. ‘신성함’, ‘성스러움’을 뜻하는 사케르에는 이 공포의 의미가 깔려있다. 두려운 대상 앞에서 어쩔 것인가. 머리를 조아리는 수밖에 없다. 감히 반항할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감은 경배로 바뀐다. 우리말에 이 이중의 감정을 가리키는 경외감이라는 적당한 표현이 있지 않은가. 어쨌든 트레멘두스한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표시하려면 뭔가를 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나. 하여 제물이 필요하다. 이른바 희생제의(sacrifice)의 시작이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제의에 대한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희생제의는 “복수의 위험이 없는” 제물에게 폭력을 집중시켜 공동체를 위기에서 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 제물, 요컨대 희생양은 폭력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공동체 내에서 가장 약한 자나 공동체 밖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는 설득력이 있으나 그것이 희생에 대한 종교적 감정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희생제의는 속죄의식에 가깝다. 희생양은 아무 죄 없이 ‘당하는’ 자며, 자기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야말로 무고한 자다. 제물을 바치는 자들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작해 놓고 멈출 순 없기에 희생과 동시에 속죄가 필요했다. 따라서 희생양은 자신을 제물로 선택한 자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죽는다. 진짜 죄를 저지른 자는 죄 없는 희생양을 제물로 바친 자들이나 그 구조에 대해서는 모두가 함구한다. 암묵적 동의 아래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기에 참회가 필요하다. 용서도 받아야 한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용서해 주나? 당연히 피해당사자, 즉 희생양이 주체가 되어야 하나 그는 죽고 없기에 죄 지은 자가 자기 죄를 용서하는 해괴한 구조가 들어선다. 차라리 자기도 죽어버리면 속 편하겠지만 애당초 자기가 살자고 저지른 짓이어서 불가능한 구조이기도 하다. 결국 ‘트레멘두스’한 존재에게 자기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속죄의식은 그래서 아주 괴롭고 경건하면서도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약간 코미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희생양이 곧 아감벤이 말하는 ‘호모 사케르’며, 오늘날에도 변형된 형태로 존재한다.
현대종교는 원시종교의 이런 기이한 구조로부터 벗어나 있지만 흔적은 남아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근원적인 종교적 심성이 그것이다. 힘들면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대부분의 인간이다. 종교는 분명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했다. 원시종교에서 분화된 소위 ‘이성적 종교’가 의지하는 절대자는 이 나약한 존재가 의탁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따라서 AI를 믿는 종교는 ‘이론상’ 전혀 이상할 것 없다. 아직은 ‘전지전능’하지 않지만 특정 영역에서, 요컨대 ‘부분적으로’ 똑똑하니까 가능성은 있다. 그런데 신(god)은 전지전능한데 굳이 지금 인간이 믿고 있는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지금도 수많은 신이 있으니 하나쯤 더 추가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AI가 현재의 여러 종교에서 모시는 신보다 ‘더’ 전지전능할 것 같지는 않다. 유신론자에게든 무신론자에게든 신은 개념 자체로 절대자니까. 오히려 전지전능함으로만 따지면 자본을 신으로 모시는 편이 낫지 않겠나. 좌우간 그래도 종교적 심성을 지닌 모든 인간에게 현재의 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른 신을 만들어낼 권리는 있다. 신을 만들어내는 것과 ‘호모 데우스’가 되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 그렇게 만약 언젠가 ‘그 분’이 오신다면 그 때는 종교의 기능과 역할이 바뀔 수도 있겠다. 희생의 토대에서 출발한 문명사의 종교와 전혀 다른 그런 종교 말이다.
박평종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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