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호시 신이치 문학상의 1차 심사를 AI가 쓴 소설이 통과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지금도 AI가 소설을 쓰거나 시를 쓰는 상상을 할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딥러닝 기술을 활용한 문장생성기라고 할 수 있는 GPT-3에 대한 기사도 심심찮게 읽거나 들어보았을 것이다. AI가 쓴 소설에 대한 현역 평론가들의 비평을 인터넷상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이야기된 지 이미 오래인 요즘 같은 시대에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작가나 시인이라면 한 번쯤 문장을 생성해 주는 AI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늘 아래 모든 시와 소설이 아카이빙 되어 있어서 검색을 통해 필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는 빅데이터나 자료 검색용 AI 같은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최근에 출간된 박금산의 장편소설 AI가 쓴 소설(아시아, 2021)도 그런 발상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다못해 국내 학술지 인용 색인을 제공해 주는 사이트에서도 AI가 인기 검색어로 노출되어 있고 인공지능 대학원이나 학과 설립이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은 물론, 간단한 질문에 대응하는 챗봇이나 커피를 주문받고 만들어주는 AI가 우리의 일상 가까이 다가온 현실을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소설이 이제야 나온 것이 이상하다 할 수도 있겠다. 제목이 대놓고 AI가 소설을 쓰는 시대와 그런 시대에 소설을 쓰는 작가와 독자들이 마주하게 될 현실을 상상하게 하는 것에 비해 사실 이 소설이 그런 시대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AI 작가를 빙자해 소설의 본질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에 가깝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러하다. 오랫동안 소설을 써 왔지만 그렇다고 잘 팔리는 소설을 쓰는 이른바 인기 있는 작가는 아닌 C가 어느 날 출판사 대표에게 이상한 제안을 받는다. 3개월치 급여를 선불로 줄 테니 9시에 출근해 6시에 퇴근할 때까지 리딩룸에서 소설을 매일 한두 편씩 읽고 그 소설에 대한 소감을 대표에게 들려주는 일을 해 달라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것 외에 다른 일을 하지 않는 전업 작가이지만 옥탑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C에게는 다소 이상하지만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3개월 후에 재계약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하자는 것, 소설을 읽는 것 외에 개인 업무는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메모를 남기거나 소설을 바깥으로 유출해서도 안 된다는 것 정도가 C에게 주어진 근무 조건이었다. 리딩룸에 그날 읽을 소설이 컴퓨터로 전송되면 C는 근무 시간에 전송된 소설을 읽고 완료 버튼을 누른다. 대표와 이야기할 약속 시간이 잡히면 대표 방으로 가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후에 퇴근하는 식이다. 읽고 난 소설은 컴퓨터에서 삭제되어 이후엔 찾아볼 수 없고 컴퓨터에는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다. 리딩룸이 대표실에서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구조라 사실상 소설을 읽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하기 힘들다. 그야말로 그때그때 읽어야 할 소설이 컴퓨터로 전송될 뿐 작가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소설 바깥의 정보는 아무것도 제공되지 않는다. 날마다 전송되는 소설은 길이도 주제도 수준도 들쭉날쭉했는데, 뒤로 갈수록 대표와 나눈 이야기들이 소설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영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고 같은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이 100여 편의 변주를 보여주기도 한다. 마치 오래전 디지털 문학이 쓰이던 시절에 선택지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생성되었듯이 하나의 이야기,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된 소설은 점점 다른 이야기로 변주되고 확장된다. C는 이 소설들이 AI가 쓴 소설이라는 의심을 처음부터 하고 있었는데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간다. 그러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AI 작가라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거나 하지는 않고 글을 쓴 작가가 AI라는 증거가 밝혀지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C의 심증에 불과하지만 동일한 한 문장에서 시작된 소설이 짧은 시간에 백여 가지 이야기로 변주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독자들 또한 AI 작가의 존재를 상상하게 된다. 아직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리고 상용화된다고 해도 그것이 얼마나 대중적·상업적 인기를 누릴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실제로 AI가 소설을 쓸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AI, 메타버스 등이 결합된 신개념 K-POP 걸그룹 ‘에스파’가 상당한 인기를 누리며 글로벌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고, ‘시리’나 각종 챗봇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 이미 일상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AI 작가에 대한 상상이 더 이상 실현 불가능하거나 허무맹랑한 상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금산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출판사 대표가 AI가 쓴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쓰는 AI를 판매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AI가 소설을 쓰는 시대가 와도 문학 시장에 대단한 지각변동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에 나 역시 어느 정도 동의한다. AI가 소설도 쓴다는 것이 상징적인 사건이 될 수는 있겠지만 온전히 소설을 쓰는 데 바쳐지는 대단히 품질 좋은 AI의 생산에 시장이 당분간은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소설이든 시든 문학작품을 읽을 때에는 단지 스토리의 재미만 추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고 작가와 시인 자체에 대한 관심, 그가 살아온 삶의 경험과 상상 속에서 쓰인 작품에 공감하는 것이기 때문에 AI 작가의 작품임을 아는 순간 감동은 사라질 거라는 생각에 적어도 좋은 문학의 순기능을 아는 사람들은 공감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에 대한, 그리고 그런 문학작품을 쓰는 작가에 대한 존중의 마음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하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AI 판사를 기대하는 마음처럼 인간 작가나 시인에게 실망하는 사건들이 지속된다면 AI 작가의 작품을 선호하는 현상이 나타나지 말란 법도 없을 테니까. 이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AI 작가가 소설을 썼으리라고 상상하면서 C가 자연스럽게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에 있다. 무엇이 소설을 소설로 만드는지, 우리가 소설을 읽을 때 관습적으로 갖게 되는 이런저런 편견들, 소설의 어떤 점이 소설을 소설답게 만드는지, 어떤 이야기가 더 소설적인지 하는 것들이다. C의 입을 통해, 때로는 출판사 대표의 입을 통해, 서로 간의 대화를 통해 무심코 노출되거나 뒤늦게 자각하게 되는 이런저런 편견들을 보여주면서 이 소설은 한편으로는 독자로서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야구 소설을 읽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소설 속 인물들을 남성으로 읽게 되는 모습이라든가 하는 인물의 성별에 대한 편견부터 ‘외계인’이라는 용어 속에 드러나 있는 외계 존재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견에 이르기까지 무심코 지나친 관습과 관행에 대해 소설은 지속적으로 질문을 던진다. AI가 썼다고 C가 믿고 있는 수많은 소설들에는 사실상 등장인물의 성별 표지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 사실을 거의 계약 기간이 끝날 무렵에 가서야 C는 깨닫는다. 박금산의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도 C에 대한 아무런 성별 표지가 등장하지 않았는데도 C를 무심코 남성으로 읽었다가 대표가 딸을 잃고 딸과 이름이 같은 C를 이 업무를 진행할 작가로 선택했음이 드러나는 장면에 가서 C가 여성이거나 대표의 딸과 단지 이름이 같은 남성일 수도 있음을 깨닫고 자신의 편견이나 고정관념과 마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등장인물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갖게 했을지 박금산의 소설은 집요하게 물으며 AI가 소설을 쓸 수도 있는, 인간의 특권이라고 우리가 믿어 왔던 것들이 사라진 시대에도 문학이 존재 이유를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지 성찰하게 한다. 이경수(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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