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아홉 살 때로 기억한다. 놀이문화라고는 동네에서 돌을 던지며 술래잡기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절, 동네에 있던 만화방은 동화책으로부터의 일탈이었다. 당시 봤던 숱한 만화책 중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제목은 기억 안 나지만, 아홉 살 어린이에겐 충격적이었던 그 만화책의 내용은 이렇다. 머지않은 미래, 모든 가정은 아이를 낳지 않는다. 모든 이가 영생을 누리고 있으므로 아이를 출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영생을 누리는 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갓난아이를 원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어른들의 말을 잘 듣고 기본적인 일과 정도는 스스로 해내는 7세에서 9세 사이의 어린이만을 원할 뿐이다. 그렇게 어린이들은 일곱 살 아이의 모습으로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아이들에겐 특징이 있다. 바로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는 것. 당시 아홉 살이었던 나는 일곱 살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사이보그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야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이 무척이나 순수했구나 하며 웃지만, 만화책을 보고 온 그날은 밤새 울었었다. 그 책에서 가장 무서웠던 내용은 아홉 살 생일을 맞으면 어린이의 뇌에 장착된 기폭장치가 작동하여 아이가 파괴되고 소멸한다는 사실이었다. 1년 중 가장 기쁜 생일날 사라진다니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기폭장치를 끄는 방법은 없지만 살아갈 방법은 딱 하나, 혹시나 기폭장치의 스위치를 누를지 모르는 부모에게서 거리를 두는 것. 며칠 고민하던 나는 집을 떠나리라 다짐하고, 갈 곳을 물색하며 한동안 거리를 방황했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다. 몇 해 전, 인간의 얼굴을 한 로봇이 인류를 멸망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기사에서 보았다. 기사에 대한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이를 로봇의 시답잖은 농담으로 여겼고 또 다른 몇몇은 인간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많은 이들이 로봇기술로 도래할 기분 좋은 미래를 꿈꾼다. 물론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상을 그린 소설과 영화 등에서는 여전히 로봇이 인간을 공격하지만 이제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그 작품의 서사에만 관심이 있다. 철들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내가 어느새 철이 들어서 세상을 재미없게 바라보는 중인 것이다. 그런 나의 일상에 우연히 찾아온 『로봇 수업』은 어린 시절의 향수와 미래에 대한 설렘을 동시에 던져주었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하려 했던 몇천 년 전 사상가들의 철학책에 푹 빠져 있던 나에게 『로봇 수업』은 예측하지 못할 미래에 인간과 공존하게 될 로봇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 총 9강으로 나뉜 구성은 한 강씩 읽을 때마다 로봇에 한발 다가설 수 있게 도와주었다. 1강은 로봇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무수히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고, 2강은 로봇의 시작을 인류의 역사에 비유하여 설명해 주었으며, 3강의 로봇의 진화 과정을 읽을 때는 생명체의 진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4강은 로봇이 갖추어야 할 것들을 논해 읽는 이가 관심을 유지하도록 해주었으며, 5강부터 8강은 인간의 삶과 로봇을 어떻게 연결할지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마지막 9강은 로봇과 함께할 인류의 미래를 생각해보도록 나의 사고를 열어주었다. 작가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하여 읽는 이의 시선을 붙잡아 둔다. 작가는 지루할 틈이 없이 독자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며 독자로 하여 생각의 끈을 놓지 않게 만든다. 하지만 책을 읽는 누구도 작가의 질문에 쉽사리 답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인류가 스스로 끊임없이 되물었던 질문들을 작가가 재차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그런 질문들도 인간의 독자적 삶이 아닌 로봇과 의 공생관계 속에서 묻게 되었다. 중세 이후 과학의 발달로 인간은 신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신에 의해서만 규정되었던 인간이 스스로를 규정하게 되자 인간은 능동적인 주체로서 삶을 살며, 과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성찰해 왔다. 하지만 아직 인간 존재의 본질을 채 규명하지도 못했는데 인간은 자신과 비슷한 또 다른 객체를 생산하여 그들을 정의하고 규정하고자 한다. 규정되지 않은 존재가 객체를 규정하려 할 때 그 불확실성은 이내 두려움으로 표출된다. 그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 외면으로 귀착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책 속에서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인간이 두려워하는 미래는 인간을 똑같이 닮은 로봇과의 공존에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흔히들 아는 로봇의 3원칙에 관한 단순한 이야기로 논리를 이끌어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1강부터 9강에 걸쳐 설득력 있게 미래를 설계한다. 책을 읽은 이들도 너나 할 것 없이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슬며시 미소 지을지 모르겠다. 『로봇 수업』은 평소 로봇에 관심이 많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도 흥미로운 책이다. 로봇 입문서 격인 책이므로 로봇 세상으로 첫 여행을 함께 떠나기 적절한 책이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는 로봇으로 변화되는 일상과, 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결국 로봇이 있는 세상은 인간이 사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로봇 수업』에는 로봇 입문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많은 정보가 나열되고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한 설명이 충분치 않아, 인문학에 평생을 묻혀 살았기 때문인지 이미 알고 있던 사실보다 모르고 있던 것이 너무 많았던 나는 지식의 한계를 경험해야 했다. 사실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 책이다. 『로봇 수업』은 궁금증을 유발하여 더욱 많은 관심을 끌고, 이 분야의 다른 정보들을 찾아보게 만든다. 좋은 책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독자가 궁금증을 갖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로봇 수업』은 큰 자극제가 되어 주었다. 요즘엔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면 로봇 관련 서가를 둘러보게 되었다. 이전에는 문학, 철학, 윤리학 위주의 독서 편식을 하던 나의 눈이 또 다른 분야에 눈길을 주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로봇 수업』은 누군가에게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로봇 수업』에서 작가가 하고자 했던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이건 꿈꾸지 않는 미래이건, 혹은 미처 꿈꾸지 못한 미래이건 미래는 어느 순간 우리 옆에 와 있을 것이다. 불쾌한 골짜기를 향한 반발심은 단순히 사람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한 AI에 대한 감정만은 아닐 것이다. 100여 년 전, 자동차를 탄 사람을 보던 마부의 감정 속에도 그러한 불쾌한 골짜기는 존재했을 것이다. 변화된 세상에 적응하는 일은 어렵지만, 인간은 항상 변화해왔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 변하지 않고 지켜져 온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애니악이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것처럼 외적 환경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물질에 의해 정신이 결정된다고 유물론자들이 말했듯 우리는 어느 순간 인간으로의 가치를 잊거나 잃을 지도 모른다. 로봇과 나를 구분하던 경계를 허무는 순간, 우리는 영화처럼 AI와 사랑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책을 읽고 난 독자들이 풀어야 할 삶의 숙제이다. - 송욱빈 (영동고등학교 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