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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시대, 아는 것이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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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6 16:59

 

친구가 된 왓슨

인공지능 왓슨(Watson)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속도는 세계 유수 기업 IBM이 수 년전 우리에게서 잠시 멀어졌던 거리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첨단 기술, 최신기기의 발달을 추적하기에는 게으른 이성을 갖고 있는 나에게 IBM은 오래전 286 컴퓨터에 삽입되는 플로피 디스크 상부에 적혀진 이름으로만 기억되고 있었다. 왓슨의 유행은 IBM에게 새로운 옷을 입히고 등을 떠밀어 다시 우리 앞에 세운 듯하다.  

  병원의 진료기록, 개인의 체형, 유전체, 심지어 라이프 로깅 기술을 통한 생활태도 데이터를 수집하여 맞춤형 진단을 내리는 인공지능 의사 왓슨은 혁신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왓슨이라는 이름은 인공지능 의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빅데이터에 기반한 기계학습 알고리즘 플랫폼의 이름인 왓슨은 날이 갈수록 호환성을 높여가며 우리의 주변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인공지능 이미지 판별 기술을 장착한 AI 형사와 수 많은 판례들을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하고 빠른 속도로 분석해 결과 값을 제시하는 AI변호사는 AI의사보다 앞서 우리에게 찾아왔다. 최근에는 AI 인사담당관의 맘에 드는 법을 알려주는 입사면접지침까지 나왔다. 표정, 목소리, 뇌파까지 파악하는 그에게 잘 보이기란 한편으론 매우 어려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단순하다고 한다. 그가 갖고 있는 데이터를 거꾸로 분석해 학습하면 된다. 판매되는 연습프로그램 회당 3000원부터 패키지로 20000원까지 다양하다. AI가 항상 이렇게 우리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무서운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AI작가, AI화가, AI반려견, AI애인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는 AI친구들의 종류도 해가 갈수록 아니 날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그들에게 마음을 열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든다. 이들은 모두 왓슨이거나 최소한 왓슨의 사촌이다. ‘왓슨’은 대한민국의 소년과 소녀를 대표하는 이름 ‘철수’, ‘영희’ 만큼이나 보편적인 이름이다.  

인공지능 심층 세계관 

  우리는 인공지능을 말을 하니까 친구라 여기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에 지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 기계 덩어리를 그렇게 부르는 배경에는 독특한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학의 한 분야로서 ‘인공지능’이 지향하는 바는 문제 해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를 해결해야하는 주체의 밖으로부터 주어진다. 문제를 해결했다는 징표는 문제가 주어진 그곳으로 무언가를 내놓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아웃풋, 출력 값이라 부른다. 그럼 출력을 내놓는 그 기관을 왜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내놓으면 다 지능인 것일까?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것은 문제를 준 당사자의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아웃풋을 내놓은 그것이 인풋이라는 정보를 받아들여 처리했음을 의미한다. 정보를 처리하여 문제주입자의 욕구를 채우는 능력, 즉 정보처리능력을 인공지능 공학자들은 지능이라 부른다. 어려운 과정을 생략하여 말한다면, 이 지능을 정보처리능력으로 보는 입장을 우리는 계산주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지능이란 입력된 정보를 계산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인공지능은 인간과 같은 지능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런데 거꾸로 말하면, 계산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의 원형 즉 인간의 지능의 본질을 정보처리능력으로 본다. 눈으로 본 것을 뇌가 계산하여 기억하는 과정이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이고 그것이 지능의 역할의 전부다. 

한편 계산주의의 뒤에는 또 다른 세계관이 놓여 있다. 보이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지만 뇌는 계산을 할 수 있다. 감관에 주어지는 자료들을 실재하지 않는 환영으로 본다거나, 눈과 귀라는 감관이 오작동한다고 의심한다면 계산주의는 성립될 수 없다. 받아들여지는 객체가 실재라는 것의 의미는 다름이 아니라 그 객체는 보여 지고 만져지는 물리적 실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신, 영혼과 같은 것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상식적 실재론이라 이름하는 이것을 철학자들은 과학적 실재론이라 부른다. 

  보이는 것을 진짜 있는 것이라 믿는 것은 상식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만이 진짜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선뜻 인정해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것들 이를테면 사랑, 슬픔, 종교와 같은 것들은 여전히 우리의 중요한 관심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럼 인공지능 세계관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세계관에 따르면 사랑, 슬픔, 종교 이런 것들은 일종의 현상이고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보면 그 속에는 물리적으로 규정 가능한 어떤 것이 자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랑과 슬픔은 뇌라는 물질 덩어리에서 분비하는 화학물질의 작용이고 종교에 집착하도록 하는 감정도 그러하다. 보이지 않는 것의 뒷면에는 보이는 것이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설명에 집착한다. 그들은 과학이 자연의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이상을 갖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보이는 것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자 부단히 노력한다. 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물리적 환원주의, 제거적 유물론이라는 말로 이름한다. 

요컨대, 인공지능의 세계관인 계산주의의 뒤에는, 과학적 실재론이 있고 또 그 뒤에는 물리적 환원주의가 이 모든 것의 근본적인 토대로 놓여 있다. 

아는 것이 힘일까? 

갈라진 암벽에 피는 꽃이여 
나는 그대를 갈라진 틈에서 뽑아낸다.
나는 그대를 이처럼 뿌리 채 내 손에 들고 있다.
작은 꽃이여 ---만일 내가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가 무엇인지, 뿌리만이 아니라 그대의 모든 것을 ---
그때 나는 신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으리.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 』에서 영국 시인 테니슨의 시를 인용한다. 그에 따르면 이 시는 알고자 하는 대상을 쪼개고 쪼개어 그것에 대해 완벽한 지식을 소유하고자 하는 서구의 과학적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자연안에 특정한 공간을 점유하는 물리적 실체로서의 꽃 한 개를 뿌리채 뽑고 실험실 메스와 같은 손아귀에 쥐고 현미경 같은 안경으로 들여다보는 행위에서 우리는 꽃송이에 퍼져있는 색의 조화가 주는 감동, 그 향내가 주는 정취를 찾는 일을 기대할 수 없다. 건조한 시선으로 그 한 가지를 분석하는 자연 탐구자는 호기심 충족의 열망에 자신을 내어 맡긴 듯하다. 꽃을 분석하며, 인간과 세상에 대한 빈틈없는 앎을 꿈꾸는 그는 근대를 대표하는 격언 ‘아는 것이 힘이다’(scientia potentia est)를 철저히 신뢰하는 과학자(scientist)다. 

  한편 괴테는 한 편의 시를 통해 자연의 껍데기들만을 앎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연과학자들이야말로 정말로 애처로운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의 편에 서서 세상을 보면, 지금까지 살펴본 과학적 세계관이 자연과 삶의 편린들만을 더듬고 있을 뿐, 양자를 아우르는 배후의 일자를 조망하기에는 편협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과연 아는 것이 힘일까?

  지난 2014년 오바마 행정부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뇌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구체적인 프로젝트의 목표는 뇌 지도를 완성해서 각종 뇌 질환에 대한 치료책을 내놓는 것이지만, 그 배후에는 이를 통해 인간 이해에 대한 객관적이고 실증적인 답을 내놓는 거대한 목표가 놓여 있다. 이 원대한 꿈은 사이보그 유토피아를 꿈꾸며 이에 참여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을 추동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이들에게는 문학가 괴테보다는 베이컨을 신뢰하는 근대 과학자의 세계관이 적합해 보인다. 우리는 이를 앞에서 제거적 유물론, 물리-화학적 환원주의로 이름했다. 첨단철학이라 할 수 있는 신경철학(Neurophilosophy)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 위에서 건립되어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 이 세계관이 인공지능 시대를 선도하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음의 집인 뇌도 몸이라는 물질 덩어리의 일부이기 때문에 전통적으로는 정신의 활동이라고 여겨졌던 감정, 느낌 등도 양화 할 수 있고 디지털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설파하는 이 첨단철학은 더 간편하고 안락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인공지능에 자신을 맡기는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러나 사람의 눈이 다양하듯 세계를 보는 시선도 다양하다. 최근 독일의 철학자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나는 뇌가 아니다’라는 책을 통해 학계에 만연한 신경철학 일변도에 제동을 건다. 그는 자아와 마음에 대한 탐구를 ‘정신철학’으로 규정하면서 경험주의 인지 철학을 자기 안으로 품는다. 정신철학에 따르면 신경철학은 마음 탐구의 한 영역이지만 마음 탐구가 곧 신경 철학인 것은 아니다. 정신철학은 물질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상식을 토대로 물질과 과학의 세계로 환원되지 않은, 환원될 수 없는 영역의 있음을 존중한다. 나는 이러한 철학사조의 원형으로 계몽주의 철학의 완성자 임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꼽는다. 공자는 진정한 앎을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의미로 해석한다. 인간의 지식, 이성의 한계설정을 이론으로 정립한 칸트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견지한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경계를 확실히 해야한다는 주장까지는 공자의 그것과 유사하지만, 칸트 철학의 함의가 거기서 다한다고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를 절반만 이해한 셈이다. 앎의 경계를 확정하면 자연히 그 이상의 영역이 확보된다. 내 땅이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순간 내 소유가 아닌 대지의 존재성은 거저 주어진다. 이와 유사하게 ‘내가 있음’을 이야기하는 바로 그 순간 ‘내가 아닌 존재의 전체집합’의 존재의 가능성을 부인할 이유는 사라진다. 물리적 자연 세계에 대한 앎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은 칸트 철학의 핵심이다. 그로부터 그는 알 수 있는 세계와 알 수 없는 세계를 구분하면서 지성의 영역을 전자에 국한시킨다. 이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현상과 물자체의 구별의 원리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우리가 주목하야 할 것은 구별 자체가 아닌 구별을 통해 주어지는 또 다른 앎의 세계다. 

  ‘아는 것은 힘이다’라는 것을 칸트가 부인할 리가 없다. 칸트에게도 아는 것은 힘이다. 그러나 그 힘은 내가 확보하고 있는 지식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물이 H2O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구구단을 잘 외울 수 있다는 것, 혹은 모 정치인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바로 그 힘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아주 즉자적인 힘의 단계다. 두 번째 단계의 힘은 공자가 말한 것처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구분하는 앎에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힘은 미지의 영역을 희구하며 그 가치를 존중할 수 있는 희망함의 능력이다. 사이보그라는 물질 덩어리가 인간을 대체할 것 같은 시대, 우리의 감정과 정서가 모조리 디지털화되어 데이터 베이스에 저장될 것 같은 시대, 정신이 몸이 되어 몸이 곧 인간이 되는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마치 메시아 역할을 할 것 같다. 인공지능 시대, 꿈꾸는 능력이 바로 힘이다.    

김형주 (중앙대 인공지능인문학단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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