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규 중앙대 인문콘텐트 연구소장, 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왼쪽부터)이 30일 오후 서울 서소문에서 인문학-기초과학 위기에 관한 대담을 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2022.03.30 모두가 기술 발전을 강조하는 가운데 인문학과 기초과학은 계속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차기 정부 출범을 앞둔 상황에서도 과학 기술이 중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대학의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지만, 기초학문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전무하다. 인문학과 기초과학이 처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정부가 할 일은 무엇일까. 지난달 30일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 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 이찬규 중앙대 인문콘텐츠연구소장과 함께 기초학문 학술 정책을 진단하고 차기 정부의 역할을 들어봤다.
이강재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소문에서 인문학-기초과학 위기에 관한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2022.03.30 이준호: 기초연구비는 지난 정부에 비해 두 배 올랐다. 그런데 정작 ‘기초과학’을 하는 학자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늘어났다. 기초연구라고 할 때 그 ‘기초’라는 게 주장하는 사람마다 달랐다. 예를 들어 ‘기초공학’도 기초연구에 속해 연구비를 받을 수 있었다. 실제로 지키고자 했던 펀더멘털(근본, fundamental) 학문은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 또 개인에게 주는 연구비가 늘었지만 연구소 단위 지원이 줄다보니 지방대 부설 연구소가 유명무실화됐다. 이강재: 2019년 인문학 학문 후속 세대 지원을 위해 학술연구 교수 제도를 만든 것은 큰 성과다. 그런데 인문사회 전체 연구비는 지난 5년간 거의 증가되지 않은 채 학문 후속 세대와 기존 학자 모두에게 나눠줬기 때문에, 학문 후속 세대 몫이 늘어난 만큼 기존 학자의 연구비는 줄었다. 일종의 풍선 효과다. 이찬규: 이번 정부에서 융합 연구를 강조했지만, 융합에 대한 인식이 근시안적인 부분이 있다. 인문학 하는 사람 중 인공지능에 관심이 있다거나, 인문학자가 코딩을 조금 배우면 그게 융합이라고 하는 차원에 머물러있다. 인문학자 관점에서 보면, 인문학을 과학기술공학 연구에 장식을 하나 더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더라.
- 대학도 기초보다는 응용학문을 더 강조하는 분위기다.
이찬규 중앙대 인문콘텐트 연구소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소문에서 인문학-기초과학 위기에 관한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2022.03.30 이찬규: 우리는 유행할 때마다 대학에 학과를 개설한다. 예를 들어 반도체학과, 인공지능학과를 학부에 만들어놓으면 그 학생들이 학부 과정을 졸업해서 전문가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선진국에서는 응용학문은 거의 다 대학원에서 하고 기초학문은 학부에서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면 학부에서 무엇을 배우고 대학원에서 어떤 걸 할지 명확한 정책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뒤죽박죽이라면 결국 둘 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준호: 일본과 비교하며 ‘우리나라는 왜 노벨상이 없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직접 일본에 가서 보니 일본 대학은 연구실 규모가 작고, 한 분이 30~40년간 같은 연구를 할 수가 있다. 그런 연구실이 일본 전역에 2000~3000개 깔려 있다. 오히려 일본은 ‘이제 더 이상 노벨상 후보가 안 나올 것’이라는 걱정을 한다. 최근 몇십년 동안 유행에 따라서 연구를 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강재: 지금 우리가 K-컬쳐, 문화강국 소리를 듣고 있는데, 이게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지 않나. 긴 시간 축적된 인문학 교육·투자의 힘이다. 그런데 지금 바닥에서부터 인문사회 기반이 허물어져 버린다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여기까지 쌓아온 것도 모두 무너져버릴 수 있다. 그 때 가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비용은 엄청날 것이다.
- 새 정부에서 대학 관련 업무를 과학기술부로 옮기는 얘기도 나오는데.
이강재: 인문사회 학술의 개념 속에는 연구뿐 아니라 연구한 내용을 교육으로 환원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과학기술에서 이야기하는 기술개발(R&D)과는 콘셉트 자체가 전혀 다르다. 인문사회 학술은 교육과의 연관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교육부에서 계속 학술 진흥 역할을 맡으려면 지금 규모로는 안 된다. 본격적인 정책연구조직으로 키워야 한다. 이준호: 지금 교육부는 기초과학을 지원할 의지는 있지만, 손발이 없다. 연구지원 철학 측면에서 보면 교육부는 그래도 형평성을 따질텐데, 과학기술부는 수월성이 기본일 거다. 기초과학은 교육부가 맡아도, 과학기술부가 맡아도 걱정이다. 그런데 이강재 본부장이 언급한대로 교육부 내 학술 조직 규모가 커진다면 그래도 교육부가 학술 정책을 담당하는 게 좋다고 본다.
이준호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장,이 30일 오후 서울 서소문에서 인문학-기초과학 위기에 관한 대담에서 발언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 2022.03.30 이준호: 전국 자연대학장 총회에서 나온 이야기가 ‘10년 뒤 국립대 자연대가 몇 개나 남아 있겠느냐’였다. 작은 국립대들은 이미 기초과학 연구소들이 없어졌다. 물리학과, 수학과 없어진 국립대들도 있다. 사립대는 교양학부 안에 기초과학 학과들을 몰아넣어 공과대학 신입생들에게 가르치는 정도로만 쓰는 곳도 많다. 기초과학을 새로운 지식 창출의 근원으로 생각한다면 지금부터 기초과학에 투자해야 한다. '퍼스트 무버'라고 주장하며 기초를 자꾸 잊어버리면 안 된다. 이찬규: 국가가 학문적인 정책이나 전략을 어떻게 가지고 갈 것인가에 대한 방향성을 정해야 한다. 대학 자율성만 강조하며 개별 대학에 맡긴다고 하면 대학은 학생들이 많이 선택하는 과 중심으로만 지원하게 될 것이다. 그 ‘자율’이 무엇이고, 어디까지인지가 매우 중요하다. 대학을 살리기 위한 자율성 확대가 반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강재: 현재 인문학 연구자 중 뚜렷한 직업 없이 연구하고 있는 석·박사 과정 학생 수는 몇 명인지 명확한 통계조차 없다. 인문사회학계가 어느 정도의 학자들에게 안전망을 제공해야 하는지조차 뚜렷하게 알 수가 없는 상황인 셈이다. 정책을 만들고 장기적인 그림을 그리려면 이런 최소한의 수치라도 알아야 하는데, 조직과 인력이 없다. 이런 걸 연구하고 방향과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인문사회 정책연구 조직이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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