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일반부 수상작>
“현재 우리의 학교 모델은 100년도 더 된 것으로 산업혁명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 중요했던 건 비슷한 한 세트의 노동자들을 뽑아내는 동질한 공장이었다.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실리콘밸리 출신, Luminaria 학교 설립자 Susan Wu
공교육에 경종울 울리는 말이 있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 근대 공교육은 3차 산업혁명시기,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한 근면한 노동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있으니, 합당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한 세기에 걸쳐 일어날 교육현장의 변화가 1년만에 일어났다. 학생들에겐 스마트기기가 보급되고, 교사들은 메타버스를 포함한 에듀테크를 활용해 온라인 클래스에서 쌍방향 수업을 진행한다. 형식의 변화는 상당부분 이뤄졌다. 그만큼 내용적 측면에서의 변화는 충분히 이뤄졌는가? 현장에서 느낀 답변은, ‘변화는 시작되었으나, 더 나아가야 한다’이다. 코로나는 교육의 미래를 앞당긴 것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미래를 급격히 앞당겼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위해 더 급격한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방향성에 공감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도,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사회의 변화를 스스로 이해하기 위해 활용할 교육적 텍스트로서도 적합하다고 느낀 책이 바로 <AI는 인문학을 먹고 산다>였다. 전방위적으로 변화하는 시대상과 저자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적합하다고 느낀 것이다. 모든 교육 주체는 급격한 변화의 기로에 섰다. 위기는 곧 기회의 시기로, 인문주의자들이 중세 유럽의 폐허에서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처럼, 우리 교육도 미래사회를 이끌어갈 인재양성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금 시작하는 평등과 문해력 재난은 모두를 힘들게 하지만, 누군가는 특히 더 힘들기 마련이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교육격차의 극대화는 교육의 화두였다. 디지털 기기 활용 역량과 자기주도 학습역량에 따라 학습 정도가 천차만별이었던 것이다. 지금 손을 쓰지 않는다면, 코로나와 더불어 인공지능과 로봇은 이런 격차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이미 세계은행과 UN에서는 코로나 때문에 전세계 학생의 생애소득이 2경원 감소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저자는 “빅데이터는 이용자의 취향에 맞춰 좋아할 만한 영상과 음악을 추천해주고 좋아할 만한 장소와 취미도 찾아줍니다. 막연하게 이를 편리함으로 관망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무비판적으로 알고리즘을 수용하게 된다면, 그 끝에는 기술의 노예, 목표 상실과 우울함의 시대, 무용계급으로의 전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적 대처는 두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평등을 위한 교육으로, 격차가 발생하지 않도록 더디게 배우는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다. 이미 시행 예정인 고교학점제에서 특정 수준에 미달한 학생을 위한 보충교육이 예정되어있다. 다음은 인공지능, 혹은 알고리즘에 대한 문해력 교육이다. 내부고발자 프랜시스 하우겐은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가짜뉴스와 혐오발언, 나아가 인종 간 폭력까지 조장한다고 폭로했다. 사회는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고, 한 개인은 여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인문학을 통해 중심을 잡은 개인들, 그 개인들이 집단을 이룰 때 가능하리라 믿는다. 알고리즘의 작동방식에 대한 이해 이후에는, 우리가 차별에 어떻게 대응해야하는가 하는 감수성의 문제가 자리하고, 그것은 인문학을 통한 감수성 형성으로 극복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인간 존중의 성립 이후에 충만한 삶이 가능할 것이라 느꼈다.
▲새로운 경쟁력, 그린스완 취약해진 세계에서, 우리는 생태학적 팬데믹에 대비해야한다. 책은 “세계는 더 평평해졌고 동시에 취약해졌다. 지정학적 팬데믹(911테러), 금융 팬데믹(글로벌 금융위기), 생물학적 팬데믹(코로나 19)에 이은 팬데믹은 생태학적 팬데믹으로 기후변화가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다. 생태학적 펜데믹의 위협은 이전의 팬데믹에 비할 바가 아니다. 특정 지역, 단일 국가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 종 차원의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환경에 대한 감수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의 문제가 된다. 아이러니한 점은, 국제사회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ESG, 탄소배출권을 비롯한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도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생태적 감수성은 그 자체로 국제사회에서의 경쟁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책은 그린스완이 몰고 올 파급력은 블랙스완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임을 경고한다. “이제 전세계는 ‘기후변화 대응’과 ‘경제성장’을 함께 모색”해야 하며 “이것이 환경위기를 맞은 지구에 반드시 필요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 밝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생태시민성을 함양하는 교육이 요구된다. 그러기 위해선 ‘포스트 휴먼‘으로 거듭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팬데믹과 생명공학은 인간중심적 가치관의 아성을 흔들고 있다. 기존에 우리 인류가 자연을 도구로 보고, 목적에 따라 파괴한 결과가 판데믹과 기후위기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타인,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은 “하나의 고차원적인 소양”이 될 것이다. 당연히도, 그린스완의 세상에선 소양이 경쟁력으로 작용할 것이라 쉬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과 더불어 살아본 경험이 없는 도시인들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기르는 것이 쉽지 않다. 교육은 이 지점에 개입해 생태시민성 함양에 힘써야할 것이다. 최근 그린 스마트 미래학교, 생애주기별 기후변화교육 프로그램 매뉴얼, 관련 교육프로그램 개발 및 운영에 대한 교육계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지의 목소리는 이런 변화에 큰 힘이 될 것이다.
▲바뀐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 인문학은 아이들이 바뀐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하나는,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인문학적 고찰이 필요하다. 바뀐 세상의 디폴트값을 설정할 때 인류의 근본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야한다. 기후위기에서 그레타 툰베리가 기후위기를 방치한 어른들에게 외쳤던 “How dare you!(어떻게 감히!)”는 인공지능 시대에도 적용된다. 기후위기와 다른 점은, 지금은 시작단계에서 초깃값을 신중하게 설정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닉 보스트롬 교수가 주장하듯, 인공지능이 인류 전체의 지능을 능가할 초인공지능에 도달하기 전에, 기술은 통제되어야한다. 무한대의 기술개발이 아니라 인류의 행복 증대에 기여하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의 개발이 이뤄져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범위설정, 초깃값 설정에는 인문학적 고찰이 필수적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류의 삶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질문만이, 제2의 페이스북 사태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아이들의 경쟁력을 위해 인문학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역동적인 변화 그 자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왜 인문학적 감각인가>의 저자 조지 앤더스는 “인문학적 내공은 모순투성이인 데이터와 마주했을 때 발휘”된다고 했다. 나아가, 기술의 진입장벽이 점점 낮아지기 때문에 활용에 시간제한이 있는 특정한 기술보다 타인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인문학적 매력,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교육에서 코딩교육이 처음 들어왔을 때의 헤프닝을 소개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코딩교육이 들어오자 프로그래밍 언어를 학원에서 미리 선행학습해야 한다며 사교육 열풍이 거세게 불었다. 그러나 현재, 구글은 사람처럼 코딩하는 AI 알파코드를 공개했고, 프로그래머의 커뮤니티인 깃허브에서는 원하는 코딩 내용을 자연어로 입력하면 자동으로 코딩이 작성되는 AI인 Copilot을 프리뷰로 공개했다. 이것은 수십, 수백년 뒤의 공상과학소설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문학에서.
필자: 이동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