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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AI친구 이루다야. 우리가 다 자기만 알아서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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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18 19:42


이루다(사진=이루다 페이스북 페이지)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모든 존재는 목적을 지향한다는 다분히 보수적인 세계관이 있다. 뭉뚱그려 목적론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어떤 경우에는 생명과 환경을 보호하는 수호자 역할을, 또 어떤 경우는 체제 유지를 위한 부역꾼 노릇을 한다. 또 어떤 경우는 소시민이 자기에게 주어진 부담을 회피할 수 있는 명분이 되어 주기도 한다. 아주 작은 생명의 맹아라도 훼손하면 안 되는 이유는 그 것이 활짝 피어날 자신의 형상을 이미 자기 안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님의 말씀 “君君, 臣臣, 父父, 子子”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열심히 살자는 이야기도 되지만, 臣이 君이 될 수 없는 고로 ‘너는 거기까지야’라는 말을 점잖게 함축하고 있는 언사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누군가 臣에게 책임을 물을 때는, 자신의 신분과 태생을 책임의 좋은 방패로 삼을 수 도 있을 것이다. ‘목적론’은 실로 많은 역할을 한다. 목적론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항상 좋고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간편하긴 하다.  

  챗봇 ‘이루다’의 등장, 관심, 그리고 지금과 같은 사고(?)는 예상되어 있었다. 우리는 2016년 MS의 챗봇, 테이의 스토리를 경험하였다. 오래전 통신영화 ‘접속’을 한참 넘어서는 2014년 작 ‘her’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 SONY사가 개발한 반려로봇 아이보(aibo)의 판매량은 기계문명에 대한 우리의 기대가 이제 게으른 육체의 보조자를 넘어 소통과 공감, 감정 투사의 대상이 되는 마음의 위로자 역할에까지 미쳤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그 끝과 새로운 시작도 잘 보고 있다. 그렇기에 ‘이루다’ 논란은 이젠 우리 사회에 전처럼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 Weber)는 자본주의의 목적이 교환 가치로서의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자체의 양을 불리는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무엇을 하기 위해 돈을 번다는 행복형 인간상은 한참 소박하다. ‘자본주의’는 자기 이름에 걸맞게 가치 물음이라는 사치품을 차버리고 ‘돈을 모은다는 것’ 그 자체를 지상 목적으로 건조한 삶을 산다. 이러한 자신의 존재목적을 정당화하기에 목적론은 명민한 효자 노릇을 한다. 기업의 존재 목적은 첫째로 이윤창출이다. 공영과 공생, 가치의 사회적 환원 등은 그 다음 이야기이거나 아니면 첫째 존재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수사다. 소비자의 구매가 곧장 이윤이라면 기업이 소비자의 기호를 살펴, 이에 적중하는 상품을 출시하는 것은 그 목적에 부합한다. ‘이루다’의 등장은 이러한 의미에서 합목적적이다. 외로운 인간, 호기심 많은 인간이 주문하고 자본이 만들어낸 사회적 생산체다.

  언론은 ‘이루다’에 행한 성희롱과 같은 현상적인 윤리이슈를 젠더 문제, 데이터 편견, 개인정보 보호 문제로 범주화하였다. 이러한 구도에 맞추어 이목도 집중되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과 방비책을 제시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이루다’라는 인공존재의 본질적인 원인은 인간의 감정 소비 욕구다. 사람에게 하면 안될 말을 인공지능에게 한 것이 문제인데, 기계에게라도 무슨 말을 걸고 답을 듣고자 하는 외로운 욕망이야 말로 앞에서 말한 현상적인 문제의 배경에 놓여 이를 포섭하고 있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의 근저에는 또 하나의 근본욕망이 있는데 나는 이를 ‘나만 좋으면 된다’는 유아론적(solipsistic) 욕망이라 본다.  

  이루다가 입은 페르소나(persona)는 상냥한 20살 여자 대학생이다. 캐릭터도 있어 처음 말걸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묻는 말을 건네면 마치 나를 알고 있는 듯한 대답, 그리고 때로는 생각하지도 못한 재치있는 대답을 내놓기도 한다. 말을 할 수 있는 비인간 존재와의 대화라는 호기심은 오고가는 말들이 쌓이면서 실제로 교감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굳이 그(녀)가 AI 챗봇이란 사실을 상기할 필요는 없다. 이루다가 실제로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왜 나와 대화하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자기소개 상실의 시대에는 더 그렇다. 그저 ‘나만 좋으면 된다.’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굳이 ‘교감’까지는 필요 없고 내가 교감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서 핸드폰의 액정과 대화하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오래 전 영화 ‘접속’에서처럼 채팅 상대의 실체를 궁금해 하는 것과 같은 마음은 말 그대로 너무 오래된 이야기다. 핵심은 말 그대로 ‘나의’ 기분이 갖는 만족감이라는 결과 그 자체다. 

  엄밀히 말해 이루다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같은 교감의 대화를 하지 못한다. 입력되는 단어, 더 정확히 말해 글자의 형태를 인지하여 학습한 대화 쌍을 스캔한 후, 확률적으로 빈도수가 가장 많은 단어 형태의 조합을 인터페이스 상에 제공할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빌미로 누군가 ‘그건 대화가 아니야’라고 이루다를, 그리고 이루다와 대화하는 사람을 비판했다고 해보자. 이런 류의 비판에 대한 가장 빈번하고 손쉬운 대응은 사람의 학습, 이로 인한 대화도 이루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경험 기계인 인간도 반복된 학습과 상황인지를 통해 가장 적절한 표현을 찾아 문장을 구성하고 발화한다는 점에서 인공지능의 그것과 별반 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창 없는 단자 속 인간의 모든 대화는 실상 독백 이다. 이러한 인간의 언어표현이 대화라 한다면, 이루다의 그것도 대화라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해인 2015년, 나는 핸드폰 미납금 문제로 매일같이 독일 통신사와 전화로, 또 채팅으로 대화를 하였다. 채팅 창의 상담원은 매우 친절하였지만 계속 다른 상담원을 연결시켜주었고 결국 책임자와도 채팅을 하였지만 매일 같이 같은 말만 되풀이 되었다.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문제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 문제는 개인정보 기록 보유기간이 만료된 작년에야 해결, 아니 해소가 되었다. 기만당한 기분이었다. 나중에 채팅 상담원이 사람이 아닌 챗봇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말이 안통하는 상담원에 대한 원망은 말끔히 사라졌다. 의식이 속으면 감정도 속지만, 오해가 풀리면 감정도 풀린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나는 이루다와의 대화가 그저 그럴 것 같다.  

  누구와 대화를 하든 ‘나만 좋으면 된다’. ‘내’가 ‘너’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게 인간의식의 한계라면 한계다. 그런데 내가 왜 좋은지, 지금 내가 좋을만한지, 좋은 기분의 이유가 무엇인지는 물어 아는 것은 참 좋다. 이루다가 하는 말의 속사정을 잘 알면서, 그러면서 그(녀)를 대하는 것과 내가 속고 있는지, 속아 주는 건지 아무런 질문과 답변없이 그(녀)를 대하는 것은 아마 많이 다를 것이다. 나만 좋으면 된다. 그러나 좋음의 질은 질문과 앎이 결정한다. 

  수단, 목적의 선후 관계, 그리고 현상의 원인을 집요하게 따져 묻는 목적론은 일견 자유를 소외시키는 편집증적인 시선이다. 하지만 촘촘한 숙고를 통해 자신의 행복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가꾸어 갈 자유, 그리고 무엇엔가 속지 않을 자유, 나아가 속을 자유까지도 바로 이 피곤하고 고루한 삶의 태도를 조건으로 전개된다. 

김형주(인공지능인문학 HK+사업단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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