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19세기의 기술 복제가 촉발한 문화사적 변화에 주목하면서 ‘물적 토대’의 변화가 실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까지는 거의 반세기 이상이 소요되었다고 언급한다. 요컨대 새롭게 등장한 기술이 사회 문화의 각 부분에 연동되어 인간의 사고와 감성, 소통의 형식에 직접 관여하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나 그 변화에 조응하는 인간의 사고와 제도, 삶의 양식 등은 더디게 바뀐다는 뜻이다. 실제 모든 문명사의 격변기는 이런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인공지능 기술이 출현한 이후 우리의 삶은 어떨까? 인공지능은 ‘불현듯’ 출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인공지능에 대한 기획부터 단계적인 발전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으나 전문 영역의 초 엘리트 전문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알려진 바 없었다. 성취가 미미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실상 2016년 저 유명한 ‘알파고’가 세간의 관심을 끈 이후 모두가 주목하는 ‘놀라운’ 기술이 됐다. 그리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우리의 삶은 인공지능 이전과 이후로 나뉠 만큼 큰 폭의 변화를 맞고 있다. 벤야민은 새로운 기술이 실제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데 50년 이상이 필요하다고 언급했으나 인공지능 기술은 ‘거의’ 즉각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컨대 챗GPT는 출시되자마자 곧바로 모든 분야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인공지능 기술이 우리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인공지능의 ‘위력’은 왜 압도적일까? 이 ‘기계’가 학습한 지식의 양은 한 개인이나 집단이 습득한 ‘지식’의 총합보다 크기 때문이다. 그 양은 ‘잠재적으로’ 무한히 클 수 있다. 게다가 학습의 속도도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인공지능의 ‘위력’을 인간이 곧바로 수용하는 이유는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동을 대신함은 물론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인공지능 기술을 사회 각 분야에서 즉각 활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벤야민이 언급했듯 기술이 실제 인간의 삶에 무사히 안착하는 데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당장은 유용하지만 급하게 수용한 기술이 인간의 삶과 조화를 이룰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 <인공지능 사회문화학>은 이런 맥락에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에 들어온 이후 어떤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분야별로 나눠 진단해 본다. 인공지능 기술은 인간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기에 <사회문화학>이 모든 영역을 다룰 수는 없다. 따라서 필자들의 관심사에 따라 크게 세 영역으로 축소하여 연구 분야를 좁혔다. 첫 번째는 기술 문화 영역으로, 특히 다양한 인공지능 기술을 종합하여 구현한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룬다. 두 번째는 대중문화 영역으로 메타버스, 로봇기술 등과 복합적으로 제휴한 인공지능이 인간의 소통방식과 놀이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가는지를 다룬다. 세 번째는 예술과 시각문화 영역으로, 인공지능이 예술작품의 생산에 관여하면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변화 양상을 다룬다. 세 영역의 목표는 같다. 첫째, 인공지능 기술이 각 영역에서 끌어들이고 있는 변화는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과거의 양상과 어떻게 다른가를 살펴본다. 둘째, 이 변화가 가져오는 긍정성과 부정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셋째, 인공지능 기술의 급속한 발전이 가까운 미래에 문화의 각 영역에서 어떤 또 다른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를 조망해 본다. 첫번째 기술문화 영역에서는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자율주행 문제를 살펴본다. 인공지능은 몇 가지 고유한 특성들을 갖고 있는데, 현재 자율주행 업계를 주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가장 널리 알려진 테슬라 오토파일럿(Tesla Autopilot)의 개발과 수용에서 이런 특성들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인공지능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수용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테슬라는 언제나 안전과 기술력을 홍보하면서 자율주행 산업을 주도하는 듯한 이미지를 만들어왔다. 안전성과 관련된 끊임없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테슬라의 대응에서 인공지능의 자율성에서 비롯하는 위험에 대한 고려는 찾기 힘들며, 이는 오토파일럿의 소비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은 인공지능의 자율성, 기술-윤리-산업의 복합성, 그리고 행위성에 대한 생산자와 소비자 양쪽 모두의 몰이해를 드러낼 뿐 아니라 ‘기술로서의 인공지능’과 ‘문화로서의 인공지능’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불일치에는 인공지능이 곧 인간의 편의와 목적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방식으로 활용되리라는 기술만능주의적, 미래주의적 기대에 뿌리내린 소망사고(wishful thinking)가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소망사고는 인공지능을 과소평가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과대평가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오토파일럿과 관련된 사고와 그에 대한 반응은 기술의 고유한 특성에 대한 이해가 부재한 상황에서 기술에 대한 소망사고가 기술을 앞지를 경우 어떤 일이 생길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기술의 진보와 기술문화가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견 문화지체(cultural lag)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다. 통상 문화지체에서는 기술문화가 앞서 나가는 기술을 따라잡지 못한 채 이전의 구식 문화에 머무르면서 혼란을 일어나지만, 오토파일럿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기술은 2단계 운전자 보조에 머물러 있지만, 오토파일럿을 생산하는 쪽과 소비하는 쪽 모두 그보다 훨씬 앞선 5단계 완전자율주행처럼 오토파일럿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문화가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문화지체와는 정반대로, 이 경우에는 기술이 문화를 못 따라잡고 있다. 인공지능에 거는 기대가 인공지능의 발전 수준을 훨씬 앞지르면서 아직 없는 기술을 마치 이미 있는 기술처럼 인식하고 사용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토파일럿을 둘러싼 상황은 인공지능과 관련하여 '뒤집힌 문화지체(reverse cultural lag)' 또는 '문화추월(cultural outrun)'이 일어날 위험성을 보여준다. 심각한 문화지체가 사회병리현상으로 비화될 수 있듯이, 문화추월도 마찬가지다. 현재 인공지능에 대한 열광이 뒤집힌 문화추월 현상이 아닌지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대중문화 영역에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화콘텐츠 트렌드와 관련된 문제들을 살펴본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화콘텐츠 트렌드”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대변할 수 있는 빅데이터(Big Data),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 메타버스(Metaverse) 등의 기술이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발전과 함께 관련 기술과 문화콘텐츠 융합과 관련한 변화 양상을 다루고자 한다. 21세기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다. 동시에 ‘초연결’, ‘초지능’, ‘초융합’ 등의 혁신적인 기술 변화를 필두로 한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였고, 2016년 알파고(Alpha Go)가 인공지능 시대의 서막을 알린 이후로, 인공지능의 빠른 성장을 이끌 수 있는 빅데이터, 인공지능,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 IoT) 등이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핵심 기술로 언급되었다. 즉, 인간이 기술을 만들고, 또 그 기술이 다시 인간의 삶과 문화를 변화하게 만드는 현상이 가속화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다양한 미디어가 등장하고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면서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화하였다. 유비쿼터스(Ubiquitous)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디어 기업의 영향력이 증대되며, 미디어 안에 들어가는 문화콘텐츠의 향유가 빠르게 확대되었다. 4차 산업혁명을 맞아 빅데이터, 인공지능, 메타버스 등의 디지털 기술의 등장은 미디어를 더욱 다양하게 변화시키면서 급격한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어쩔 수 없는 비대면 시대가 찾아오면서, 현실 세계의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3차원의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인 메타버스가 문화콘텐츠 산업에서 ‘차세대 미디어 플랫폼’ 또는 ‘문화콘텐츠 산업의 미래’로 일컬어지며 현재까지도 주목받고 있다. 이러한 메타버스를 구현할 수 있는 5G 상용화, 가상현실(Virtual Reality, VR),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 AR), 혼합현실(Mixed Reality, MR), 확장 현실(eXtended Reality, XR) 등의 기술 발전과 함께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슈머(Prosumer), 현실과 같은 사회문화적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아바타(Avatar) 등이 핵심 키워드로 떠오르면서 사회문화적 변화와 함께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이 나타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문화콘텐츠 트렌드”는 먼저, ‘21세기의 원유’라고 알려진 빅데이터의 발전과 그에 따른 사회문화적 적용 및 문화콘텐츠의 변화를 알아보고, 인공지능 기술 활용과 연계를 통해 창의적인 문화콘텐츠를 생성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성장 엔진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현상과 향후 사회문화적으로 어떠한 변화를 초래할 것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발전한 메타버스 속 가상현실 및 증강현실에 대해 살펴보고, 메타버스와 문화콘텐츠의 융합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이해를 근간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사회문화적 발전이 가져올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와 함께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을 살펴보고, 혁신적인 기술과 함께 만들어진 문화콘텐츠들이 이끌 미래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생각해보자 한다. 세 번째 영역에서는 예술과 시각문화를 다룬다. 기술이 예술과 시각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오늘날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명제로 자리 잡았다. 그에 따르면 인공지능 기술은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 문제는 인공지능의 핵심 문제가 스스로 정보를 생산하는 자동성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예술작품의 가치 판단에서 척도가 되는 창의적인 정보를 산출할 수 있을까? 이 장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예술과 시각문화의 문제에 접근한다. 우선 예술작품을 규정해 온 두 가지 모델, 즉 모방 모델과 창의성 모델을 구분하고 인공지능의 창의성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검토한다. 인공지능은 학습을 통해 한정된 정보만을 산출한다는 모방 패러다임의 관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컴퓨터는 다양한 방식으로 예측 불가능한 정보를 산출할 수 있다는 창의성 패러다임의 관점이 있다. 이 상반된 견해들을 비교 검토하고 주요 논점을 정리해 본다. 다음 단계에서는 기계미학과 디지털 기술을 다룬다. 기계는 본격적으로 19세기에 등장하나 이미 18세기부터 오토마타의 형태로 정교한 자동기계가 제작됐다. 오늘날 로봇의 원형이다. 이후 기계의 정교함과 자동성을 끌어들이고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미술도 급성장하고 있다. 한편 디지털 기술은 인공지능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여주기 이전부터 이미 예술과 맞물려 미디어아트의 형태로 발전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예술작품의 생산에 관여하기 이전 디지털 아트의 전개 과정을 살펴본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인공지능을 ‘창작기계’로 규정하고 그와 관련된 다양한 문제들을 검토한다. 기존 화가들의 작품을 학습하여 그림을 생산하는 스타일 트랜스퍼와 유전 알고리즘의 원리를 소개하고 그 특징을 살펴본다. 또한 컴퓨터 비전 분야에서 일대 혁신을 가져온 ‘적대적생성신경망(GAN)’의 원리와 그 유형을 정리해 보고 이를 활용하여 실제 예술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미지 생성 인공지능이 산출한 결과물이 현재의 예술 패러다임 하에서 저작권을 비롯하여 어떤 문제들을 제기하는가를 검토한다. 인공지능은 ‘이미’ 예술작품의 생산에 개입하고 있으며, 빠르게 인간의 시각문화를 재편하고 있다. 실상 거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듯이 인공지능은 인간을 대신하기 시작했고, 그 속도는 빠르며 범위도 넓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허둥대고 있는 형편이다. 한편에서는 인공지능의 무한한 가능성에 환호를 보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부정적 파급력에 제동을 걸어야 하며 나아가 기술개발을 중지해야 한다는 급진적인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어쨌든 인공지능이 이미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공지능 사회문화학>은 자율주행차로 대표되는 기술 문화와 대중문화, 예술 및 시각문화의 세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는 변화 양상들을 현시점에서 꼼꼼히 검토해 봄으로써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 긍정성과 부정성을 종합적으로 성찰해 보기를 제안한다. 나아가 작금의 현실에서 향후 가까운 미래에 어떤 또 다른 변화가 몰려올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보고자 한다. 문규민, 박평종, 황서이(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