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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지닌 AI에 대한 섬뜩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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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27 13:42

올레 티브이 셋톱박스를 기가 지니로 교체했다. 내 의지는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도 있었다. 예전에 ‘시리’와 잠시 이야기를 나눠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이 AI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지니야, 넷플릭스 틀어줘.” “지니야, 오늘 날씨는 어때?” 같은 단순한 요구나 질문에는 그럭저럭 반응했지만 대화를 지속하는 건 대부분 어려웠다. 가령 오늘 날씨를 물어보면 세팅되어 있는 공평동의 날씨를 알려준다. 상도동의 날씨가 궁금해서 물어보면 제대로 입력이 안 되어 있는지 ‘동작구 삼도동’의 날씨를 알려주거나 하는 식이다. 질문의 내용을 잘못 알아들으면 동문서답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혼잣말이나 다른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 반응해 뭐라고 뭐라고 엉뚱한 대꾸를 하기도 한다. 대개는 맥락이 없는 말들이다. 넷플릭스를 틀어 달라는 주문에도 넷플릭스까지는 안내하지만 그 다음 원하는 영화를 틀거나 하는 건 리모콘을 사용해서 직접 작동시켜야 하는 식이다. ‘시리’ 시절과 그다지 나아진 건 없어 보인다. 요란한 홍보와 달리 별 도움이 안 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은 더딘 AI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한강의 <채식주의자> 이후에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로 선정되어서 화제가 된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에는 「안녕, 내 사랑」이라는 흥미로운 소설이 한 편 실려 있다. 주인공은 ‘인공 반려자’를 개발하고 시험 작동하는 일을 하는 인물이다. S12878호라는 새로운 AI를 구입해 세스라고 이름 짓고 이전에 쓰던 D0068호(데릭)에게 소개해 주고 하는 과정으로 소설이 시작되는데, 데릭과 달리 정보를 처리하거나 명령을 수행하고 나서 빙긋 웃는 세스의 웃음을 주인공은 불편해한다. “사람처럼 웃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세스는 주인공에게 ‘언캐니’한 존재다.

자신이 처음 개발한 인공 반려자 1호를 아직도 데리고 있는 주인공에게 AI라는 존재는 누구보다도 익숙할 텐데도 점점 진화하는 AI를 만날 때마다 그는 새로운 AI에게 낯선 두려움을 느낀다. “어느 연령대의 어떤 모델이든 후속 기종으로 갈수록 더 매력적이고 아름다워졌고 친절하고 상냥하고 정교하고 인간다워졌”으며 “주인과 상호작용하면서 주인에 대해 ‘배웠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했”지만 주인공에게는 1호가 가장 소중했다. 이후의 인공 반려자 모델들이 제품이고 업무일 뿐인 데 비해 1호는 그에게 첫사랑이자 진짜 반려자였기 때문이다. 기능을 상실한 1호는 반려가 아니라 옷장 속의 인형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그는 1호를 내다 버리지 못한다. 

그러던 중 새로 구입한 세스에게 1호의 데이터를 동기화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호는 그러고는 충전조차 되지 않는 몸이 되어 버렸다. 주인공은 마침내 고철 덩어리에 불과한 1호를 옷장 속에 영원히 누워 있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생산한 본사에 연락해 수거를 의뢰하기로 한다. 첫 직장이었던 본사 홈페이지 카탈로그에서 1호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갈색 머리에 녹색 눈의 인공 반려자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새로운 1호를 주문하기로 결심한다. 그때 누군가 방에 들어와 칼로 주인공을 찌른다. 세스와 데릭이 1호를 부축한 채로 들어와 자신들의 주인이자 반려자를 찌른 것이다. 

“당신에게만은 대체할 수 없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이고 싶었”다고 세스의 입을 빌려 1호는 말한다. 자신을 폐기하기로 결심한 주인을 향한 분노와 애증의 감정이 칼로 찌르는 행위로 나타난 셈이다. 주인공이 1호에게 유일한 반려자의 감정을 느꼈던 것처럼 1호 역시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은 그럼에도 대체 가능한 새로운 1호를 구입하는 선택을 한 데 비해 1호는 대체 불가능한 자리에 이들의 관계를 두고 싶어한 셈이다. 결과는 상대를 폐기처분하는 것으로 동일했지만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정에 더 충실한 것은 1호였다. 동기화되어 하나가 되어 버린 1호와 세스와 데릭은 감정이 시키는 대로 주인공을 찌르는 선택을 한다. 1호가 주인공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안녕, 내 사랑.”이었다. 그를 그대로 놓아둔 채 집을 나서 그들은 밤의 거리를 걷는다. 

AI가 감정을 지닐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지만 학습된 감정을 지니는 것을 넘어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AI에 대한 상상은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과 영화에서 다뤄져 왔다. 그럼에도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가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드러낸 데 비해 정보라의 소설은 한층 냉정하게 포스트휴먼에 대한 사유를 드러낸다. AI와 함께 사는 세상이나 감정을 지닌 AI에 대한 상상은 더 이상 낯선 일만은 아니다. 이미 우리 일상 곳곳에 사물 AI가 들어섰고 자연스럽게 우리와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AI와 함께 사는 세상에서라고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우리는 ‘이루다’를 향해 보여준 왜곡된 성인지 감수성을 통해 끔찍한 미래의 일부를 엿보기도 했다.

1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안녕, 내 사랑」의 주인공은 그를 ‘인공’ 반려자로 대했을 뿐이다. 자신과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고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자신처럼 상처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은 것이다. AI 기술이 하루하루 발전하는 동안 AI에 대한 문학의 상상도 경계를 넘어서 점점 우리를 향해 불편한 질문을 던지며 육박해 오고 있다. 인간과 AI의 공존은 어디까지 가능할 것인가? 인간과 닮은 AI를 점점 더 원하며 ‘인공 반려자’를 개발하는 일에 종사하면서도 인간의 웃음까지 닮은 AI 앞에서는 불편함을 느끼는 정보라 소설의 주인공과 우리는 얼마나 다를까? 감정을 느끼며 외로운 인간의 반려 역할을 하는 AI를 곁에 두기 바라면서도 막상 인간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상처받는 AI 앞에서는 낯설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결국 그들을 타자의 자리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겠다. 낯선 타자와 소통하며 공존하는 공동체를 꾸리는 일에 대한 상상은 앞으로 우리가 마주할 가장 난해한 숙제가 될 것이다. AI와 함께하는 세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타자와 공동체와 윤리에 대해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끊임없이 사유하고 실천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경수(중앙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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