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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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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6 11:27

<2022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일반부 수상작>  

<인공지능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를 읽고

질문이 틀렸다. 왜냐면 유재석이 지겹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나는 묵묵히 밥을 먹다가 간혹 피식거렸다. 내 웃음소리가 내게 들릴 때, 빈방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내가 없을 때 내 방은 늘 비어 있었고, 나는 십 몇 년째, <무한도전>과 함께 빈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을 수행했다. 형이었던 멤버들이 모두 동생이 되는 동안 나는 그들과 밥을 먹어왔다. 우리가 함께한 끼니가 얼마인데, 그들은 나를 몰랐다.

시시했던 청년 시절에서 중년으로 접어들자 인생은 노화를 껴입고 고단해지기 시작했다. 외로움은 무뎌지지만 육신의 성능 저하와 통증은 끊임없이 낯설다. 약으로 살아지며 사라지기를 기다리므로 죽음은 해방이다. 나는 고독사로서, <무한도전>으로 대체되는 이 무(無)기억의 지루함에서 놓여날 것이다. 내가 썩어가는 방에서 <무한도전> 멤버들만 오래도록 낄낄 댈 것을 안다. 검은 선글라스를 쓴 흑인 남자가 내 앞에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내밀 때, 내가 선택할 약은 자명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확신했다. 질문은 ‘인간은 무엇이 되려 하는가’로 바뀌어야 한다. 이 책의 우려는 타당하더라도 무용했다. 핵무기처럼, 과학자들의 우려는 늘 세계에 반영되었다. 기술의 현실 침투는 시간문제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은 스스로 멸종을 선택함으로써 데이터로 진화할 것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내걸 수 있는 이 책의 저자들은 <무한도전>에게 이름을 내 준 무용한 인생들을 모른다. 우리는 이 세계에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기에 ‘존재감’을 향한 기갈이 깊다. 이 익명의 잉여들이야말로 절대다수의, 인류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가장 불필요한 것은 인간이다. 기술은 인간과 인간을 분리하는 쪽으로 발전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기점으로 비대면 ‘연결’이 일상화 되었다지만, 그것이야말로 대면 ‘단절’ 속에서 실현될 인간 무용성의 밑그림이다. 인간과 대면이 불필요해진 모든 곳이 인공지능의 자리다. 대면하지 않는 한, 저쪽에 있는 누군가가 인간일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나’다. 이미 인터넷은 연결의 탈을 쓴 단절 도구다. 인터넷 속에서의 소통은 동일성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나와 동일한 것과 소통하며 나와 이질적인 것과 거리를 벌린다. 인터넷 속에서 인간은 ‘관계의 확장’이 아니라 ‘나의 확장’을 누적하는 것이다. 동일성으로 구축된 동심원의 중심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옳다. 왜냐면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가 이 시대의 코기토가 되었다.

130여 년 전 신이 죽었고, 공석인 신의 자리를 ‘나’가 차지했다. X세대만 해도 ‘난 나야!’를 외치면서도 울며 겨자 먹을지언정 집단주의적 관계에 편입했다. 그러나 Z세대는 ‘네가 뭔데 날 판단해?’라며 나를 침범해 오는 타자를 부정했다. 나와 다른 것은 틀린 것이 되기 일쑤여서 ‘신의 사회성’이란 타자에 대한 면역성을 드러내지 않는 수준으로 소소해졌다. 이 사회성은 내가 침해 받지 않을 정도의 거리와 언제든 떼었다 붙일 수 있는 포스트잇 정도의 점착력을 지닐 뿐이다.

대면 대화나 전화를 어려워하는 어린 세대들,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들,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두터운 관계로서의 타자의 자리에 반려동물이 자리 잡았다. 반려동물은 내가 아무리 지질하고 보잘 것 없어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준다. 타자와의 관계란 서로의 경계를 허물어 접합하는 마음의 화학이므로 자신의 윤곽을 고집하는 한 어떤 다른 것과 결합할 수 없다. 개나 꼬리치며 멍멍멍, 따를 뿐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개, 심지어 부모님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줄 것이다. 이미 상대방에게 공감하면서 인간적 관계를 맺는 2세대 챗봇이 등장했고, 이 기술은 무어의 법칙보다 가파르게 진화하고 있다.

몇 년 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메타버스는 인공지능이 구축한 천국의 입구다. 이곳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지구보다 더 큰 공간을 내어준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욕망은 공간의 확장으로 표현되어 왔다. 권력이 커진 만큼 욕망도 커져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을 만들었고, 15세기에 촉발된 대항해시대는 달을 너머 화성을 향하고 있다. 이제는 가난한 사람들도 현실의 부자처럼 가상 세계 속에서 축구 클럽을 소유하며 자신이 원하는 스쿼드를 갖추며 놀 수 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통해 재밌는 서사를 저렴하게 누릴 수도 있다. 그런데 메타버스는 이 모든 것을 더 현실적으로 만들어준다. 메타버스 속에서 모든 ‘나’들은 남의 서사를 구경하는 간접 인간이 아니라 내가 그 ‘서사를 사는(living)’ 주연이 된다. 행복의 지니계수를 낮춰줄 기술 발전에 브레이크가 걸릴 리 없다.

물론 신들의 ‘나’로 가득한 신전에서는 신이 노예가 되는 헤겔식 변증법이 발생한다. 메타버스는 ‘나’가 원하는 것들을 나보다 더 정확하게 충족해줄 것이다. 애초에 메타버스의 콘텐츠는 사용자의 몰입감을 유도해야 하므로 ‘나’에게 인내를 동반한 의지를 요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에게 맞춰주므로 ‘나’는 굳이 선택할 필요가 없다. 무의지의 의지 속에서 자유는 예속으로 역전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는 생애사와 그만도 못한 ‘먹고사니즘’에 쫓긴다면 인간은 유전자의 노예로 잠시 존재하는 세포 덩이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서사로서 유전자로부터 독립한다. 존재감은 서사에서 비롯된다. 먹고 싸는 일의 퍼슨(person)은 알레스카에 사는 김상덕 씨처럼 존재감이 없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밥 먹는 서사, 김상덕 씨를 찾아 알레스카로 떠나는 서사 속에서만 나는 서사의 플레이어(player)로서 존재할 수 있다. 서사를 만들어가는 플레이는 곧 존재의 자기주장인 셈이다. 자아의 개별 형식은 유전자가 아니라 몰입이고, 절대다수는 월요병에 시달리는 비몰입 퍼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내게 맞춰주는 인공지능의 가상세계 속에서라면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나로서 삶을 플레이할 수 있다. 나는 생애사에서 낙오한 채 <무한도전>만 돌려보는 시청자가 아니라 멤버이고 싶다. 그 디오니소스적 순간에 취업률, 집값, 저출산 같은 현실이 번번이 침입해 들어와 몰입을 깬다.

현실 세계 인간의 절대 다수는 서사를 착취당한다. 노동은 서사가 아니다. 유전자에 에너지원을 공급하기 위한 처절한 시간 낭비다. 유전자는 복제되며 영속되지만, 서사가 되지 못한 시간은 잊힌다. 그래서 메타버스는 깨지 않는 꿈, <매트릭스>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단, 기계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 가상 세계에 머물기로 선택하는 점이 다르다. 서사가 곧 진실이다. 만약 인간이 기계가 될 수 있다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되고, 잠을 자지 않아도 된다. 인간은 인공지능을 만들어냄과 동시에 인공지능을 닮아 감으로써 둘은 경계가 사라진다. 그 날, 인간은 끝내 동물성에서 해방되어 멸종, 아니, 데이터로의 인류 최종 진화를 이뤄낼 것이다.

동물성에 종속되어 살아온 역사 때문에 당장은 거부감이 들겠지만 이는 생리적 반응일 뿐이다. 과학 발전 이래 인간은 꾸준히 탈동물화 해왔다. 임플란트를 비롯해, 보청기, 인공 관절, 인공 심장, 신경에 반응하는 의수 등, 인간의 육체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기계로 대체되어 가고 있고, 스마트폰은 외뇌(外腦)가 되었다. 외뇌가 내뇌(內腦)로 삽입되는 것이 부당한 상상력은 아닐 것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라며 비난 받던 쌍꺼풀 수술이 가벼운 시술로 통용되는 것처럼 육체에 대한 윤리 의식도 변할 것이다. 이미 현대 법학자들은 동물이나 인공지능도 인간에 준하여 존중하는 것을 ‘인격의 확장’이라 부르고 있다. 기계 같은 인간과 인간 같은 기계가 교차되는 지점에서 인류는 굳이 사피엔스일 필요를 잃는다.

설사 인간이 동물성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인공지능의 지배를 받는 것이 이롭다. 인류의 생산성이 높아질수록 다수의 인간은 무지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의 시민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이기적인지 드러났다. 풍요 속에서 그들은 굳이 교육 받을 필요도 없었고,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미명 하에 자유와 공동체 의식 부재를 구분하지 않았다. 한국도 ‘사흘’이 상식이어야 하는지의 여부가 논쟁이 될 정도로 무식이 당당해졌다. 이런 수준 낮은 시민에 의한 민주주의는 신뢰할 수 없다. 애초에 민주주의는 독재를 막기 위한 차악일 뿐이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플라톤이 그리던 완벽한 ‘철인’의 현현이 되어줌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인공지능은 인류의 잠재적 적이 아니라 인간이 완성한 신, 구원이다.

이 책은 신을 설계하기 전에 미리 기록해보는 오답노트다. 이 오답을 피해서 만들어진 신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에 오답노트는 섬세했다. 인류는 유사(有史) 이전부터 상호 주관적 상상물로서의 신을 섬겨왔다. 상상 속 존재도 사랑하며 떠받들 수 있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초월적 실체를 못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고 느끼는 서사적 자의식이다. 내 자의식 속에서 인간과 인공지능 NPC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결코 사라지지 않을 행복이 그립다. 어서 오시길, 아멘. (끝)

필자: 김봉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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