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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인문페스티발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수상작
Level 10조회수186
2023-05-16 10:37


 
아직 오지 않은, 비로소 찾아올


  흔히 시를 결핍과 연관 짓는다. 그래서일까. 시를 쓴다는 자기소개에는 심심찮게 정신병 감별이 뒤따르곤 한다. 다른 사람을 향한 질문, 왜 돈도 되지 않고 인기도 없는 문학을 꿈꾸는지를. 틀린 사람을 향한 질타, 어쩌려고 그런 쓸데없는 짓에 시간을 낭비하는지를. 이처럼 결핍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딘가 ‘결점’이 있다고 여겨지기 마련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어느 가족>으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핍의 뜻을 ‘결점이 아닌 가능성’1)으로 재정의한다. 그렇다면, 시란 타자와의 이해 가능성을 믿는 조금 순진한 문학일 수 있을 것이며 시를 쓰는 사람은 보통보다 조금 더 순진한 사람들일 뿐이겠다. 다만 시가 작가의 결점을 토로하는 ‘부정적으로 적나라한 예술’이 아님을 증명하고 시인의 정신 건강을 보증하는 행위는 표현의 자유가 강력하게 보장되는 현대에 와서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요컨대 ‘시란 무엇인가?’라는 장르 확립의 문제가 아니라 그다음 단계, ‘시는 누구를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가?’라는 역할의 문제가 논의될 시점에 접어든 것이다.
  책 「아직 오지 않은 시」의 저자들은 입을 모아 인간을 재정의해야 할 필요에 대해 역설한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은 생물학의 분류의 ‘인간종(種)’보다는 사회학적 분류의 ‘사람’에 가까워 보인다. 고대 아테네에서 출발해 현대까지의 궤적에서 사람의 범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넓어져 왔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 되기’의 투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겨우 둘 뿐인 성별이 이해를 가로막는가 하면 얼굴색이 다를 뿐인 같은 종에게 혐오를 품는다. 자연히 의심이 커져간다. 어쩌면 <돈 룩 업> 속의 인류처럼 현실의 우리도 혜성이 충돌하는 그날까지 ‘모두가 사람’인 세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책은 시가 그 의심을 날카롭게 끊어낼 것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시에게는 그 정도의 권력이 없다. 대신 시는 좀 더 진득한 맛으로 승부한다. 공현진이 책에 소개해둔 신해욱의 시 「무족영원」에서 인간종은 양서류 무족영원목 무족영원과의 일원이다. 모두가 사람인 세상이 힘들다면 모두가 양서류인 세상이 되면 그만이라는 해학은 ‘인간’이라는 단어의 뜻을 재구축하는 시도로 보인다. 책은 “당연한 인간은 없다, 사람은 되어가는 것이다”라고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주목할 점은 굳이 ‘-어 가다’라는 말을 쓴 이유이다. ‘-어 가다’가 단순히 행위의 진행을 나타낸다기보다 정해진 도달점에 다가간다는 의미로 쓰임2)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인간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와도 일견 비슷하다. 사람이 인간을 배신하기 위해서는 인고의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김영하는 소설 「작별인사」에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이나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앞서 낱낱이 풀어헤쳤던 ‘사람과 로봇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라는 질문을 불교의 존재론적 프레임을 통해 재조명한다. 비로소 자신만의 의식을 지닌 채 삶을 완결짓는 존재야말로 인간이라는 대답과 함께, 소설은 인간이었던 자들의 최후를 백업된 의식으로 그리는 반면 휴머노이드인 주인공 ‘철이’에게는 기계 의식으로서의 영생과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는 죽음이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삶을 내려놓는 의지를 부여하며 아이러니를 확보한다. 「작별인사」는 공상과학소설이라는 제약에도 불구하고 허무맹랑함 없이 현실에서 약동한다. 사람과 로봇의 경계를 삶과 죽음에 대한 근원적 의문으로 확장시킨 소설이 핍진성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은 괄목할 일임이 틀림없다. 알파고가 인류 최고의 바둑기사들을 꺾은 일련의 대국 이래, 인류는 자신들이 특이점 사회의 여명기에 들어서고 말았음을 마침내 인정하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더 이상 허구 속의 신기루가 아니다. 작년 9월에는 미국에서 치러진 한 미술전에서 AI를 이용한 그림이 수상을 차지하기도 했다.3) 인간과 기계를 가로막던 창의성의 장벽이 마침내 허물어진 것이다. 기계는 점차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시」의 저자 중 한 명인 이경수 평론가는 책의 문두를 열며 ‘인간 너머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적인 삶은 없다. 게다가 지금 인간적이라고 믿는 것이 항상 인간적인 것은 아니다’라는 황현산 평론가의 문장을 강조한다. 이 두 문장은 시대와 융합하며 스스로 함의를 확장한다. 인간 너머에 있는 인공지능을 우리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답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던 재정의 작업이 필수적이다. 책은 ‘은유될 수 없는 혼종과의 공존’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만들어진’ 혼종적 존재들은 인간과 동물의 구분을 넘어서서 우리 앞에 또 다른 종으로서 실재하게 된다. 그런 존재들 앞에서 자연적인 생명 탄생의 고귀함이나 피와 종의 순수성, 그리고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을 구분했던 인간 중심적인 이분법들은 깨지기 시작한다. 이들은 인간 중심적 사고로 쉽게 이해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혼종적 존재라는 점에서 더 이상 인간의 완전한 인간성을 위해서 은유될 수 없다.”4)

  특이점의 시대에서 현존하는 사람의 범위가 그 효력을 잃어버리고 말 것임은 일단 명백하다. 그렇다면 재구축된 정의에서 사람의 울타리는 어디까지 넓어지게 될까. 시는 비주체를 주체화하는 단어 퍼즐을 통해 시대보다 한 발짝 빠르게 사유한다. 이것은 모든 예술을 통틀어서 시의 몫이다. 소설의 경우, 지구인에서 외계인으로 변태한 이들을 그려낸 무라타 사야카의 소설 「지구별 인간」처럼 은유적인 방식을 통하거나 테드 창의 소설집처럼 보다 직관적으로 사람의 범위를 넓히곤 하지만, 이야기라는 제약 때문에 완전한 사물에게 사람을 부여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탐구자인 시만은 다르다. 임승유의 시 「오렌지와 잠」에서 시인은 오렌지에게 용서할 권리를 부여한다. 그의 시 세계 안이라면 오렌지는 인간과 동등해진다. 책이 인용해둔 제인 베넷의 말처럼 ‘장갑, 꽃가루, 쥐, 병마개, 나뭇가지’는 저마다의 권력을 내재하고 우리에게 정동을 유발한다.5) 시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와 같은 사고의 팽창은 다가올 미지에 대한 충격의 완충재로 작용한다. 100년 전에 그려진 지금의 상상도는 실재하는 지금과는 퍽 다르다. 시는 사람 되기의 대진화에 앞서 하늘을 나는 자동차 대신 스마트폰이 등장하는, 불가해하며 무작위한 폭풍에 대비한다.
  현대인들은 살기가 힘들다, 사회가 팍팍하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인다. 날이 갈수록 파편화되어 쪼개지는 사회 앞에서 사람들은 무력하다. 책은 시가 불명확한 미래의 방지턱임과 더불어 사람끼리 멀어지는 개인주의로부터 사람을 보호하는 방패이기도 하리라고 이야기한다. 기술 발전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확장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재택근무는 우려와는 달리 꽤 성공적으로 정착했다. 직장인들은 자신의 컴퓨터 한 대로 사내 네트워크에 접속해 ‘마치 회사에 가 있는 것처럼’ 일할 수 있었다.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간 지속된 학교 시설의 비대면 수업은 부족한 부분이 있었음에도 전염병 방지를 위한 합리적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기술이 해낸 것이지 사람이 해낸 것이 아니다. 오랜 격리 속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는 인간이 여전히 관계 맺기의 동물에 불과함을 드러낸다. 책에서 윤은성에 의해 인용된 안태운의 시 「인간의 소리」 속에서 사람은 다른 짐승에 비해 그다지 우월하지 않다. 윤은성은 이 시와 함께 책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적 언어를 이해하는 것은 그 정체를 규정하려 하기보다는 시적 언어가 한 작품 내에서 작동되는 방식을 살피는 것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특히 특정한 시적 언어가 시의 생성에 기여하는 점이 무엇인지를 살피는 관점에서 논의한다면 생산적 논의가 가능할 것이다. 무엇보다 시적 언어의 생성적인 면모는 인간 주체로서 다 장악할 수 없는 이 세계를 존중하는 것과 결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6)

  설령 레이 커즈와일의 말처럼 강인공지능이 비로소 등장한다고 해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이때 시의 역할은 단순히 사람을 정의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연대를 잇는 붉은 실이 된다. 시는 기술의 발전을 인간 본연의 발전으로 여기는 현대인의 착각에 균열을 일으킨다. 시의 세계에서 사람은 그 범위가 어디까지 넓어지든 여전히 사람이다. 지금껏 인류사의 발전이 그래왔듯이, 여명 속의 우리는 떠오를 태양의 모양을 관찰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설령 상상 그 이상으로 이글거리는 태양이 떠오르더라도 괜찮다고 시는 이야기한다. 사람과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시는 여전히 믿고 있다.

박성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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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에세이 <걷는 듯 천천히>, 문학동네, 60p
2)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 ‘‘-어 가다’에 관한 의문‘을 참고함.
3) 연합뉴스, “美 미술전서 AI가 그린 그림이 1위…"이것도 예술인가" 논란”, 김지연
4) 「아직 오지 않은 시」, 271p
5)  「아직 오지 않은 시」, 99p
6)  「아직 오지 않은 시」, 25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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