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기술이 구현해야 할 사회의 길잡이, 사이보그 -김초엽·김원영의 「사이보그가 되다」를 읽고
필자에겐 4살 터울의 형이 있다. 어릴 적 낯가림이 심했던 터라 또래들보다는 형과 형의 친구들 사이에 껴서 놀곤 했다. 그러나 유치원생, 조금 커서 초등학생이 됐어도 성장기에 접어든 형들을 신체적으로 따라갈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깍두기”라는 이름으로 얼음땡이나 경찰과 도둑같은 술래잡기 놀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형들처럼 뜀박질하진 못해도 나는 엄연한 게임의 일원이 되어 놀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유년 시절을 놀이터에서 보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이 깍두기 문화를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아이가 놀이에 서투르고 뒤쳐져도, 모두에게 약자 취급을 받아도 우리들은 깍두기라는 이름을 통해 소외와 따돌림이 우리 놀이에 껴드는 일이 없도록 막았다. 술래잡기가 지루해질 때쯤이면 캐치볼이나 축구를, 혹은 가만히 앉아 모래성을 쌓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종목마다 약자는 달라졌고 공기 같은 놀이는 작은 체구와 부족한 완력을 지닌 필자도 형들 사이에서 게임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 상황과 위계가, 깍두기 자리가 쉽사리 전복됐다. 누구든 모든 놀이에서 항상 표준 이상을 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깍두기 문화는 절대적 약자를 상정해버리고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닌 모두가 모든 상황에서 함께 할 수 있는 공동체를 위한 연립의 발판이 되었다. 깍두기는 소외의 방출, 연대의 문화였다. 1. 누구나 정상성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혹자는 장애에 관하여 얘기할 때 비장애인도 언제나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장애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을 표출한다. 그러나 이런 논지는 어설픈 온정에 불과하다. 마치 비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경우만을 상황의 전복으로, 단지 장애를 기준으로만 깍두기를 선별해버리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다. 비장애인도 언제든 장애인이란 약자가 될 수 있으니 장애를 차별하지 말고 배려해야한다는 생각은 이미 차별주의로 물들어버린 오염된 문장이다. 「사이보그가 되다」의 저자 김초엽·김원영은 이를 기술이 장애를 대하는 방식을 통해 지적한다. 발전하는 의학과 과학기술은 장애를 치료의 대상, 해결이 필요한 과제로만 바라보고 있다. 이는 신체를 기술과 결합하는 사이보그가 되는 장애인들을 테크놀로지의 수혜를 받는 환자로 전락시킨다. 결국 장애인들의 정체성은 기술을 통해 교정돼야 하는, 능력이 비장애인들에 미치지 못하는 어딘가 부족한 인간으로 귀결되어지는 것이다. "장애란 단지 신체의 기능적(도구적) 역할을 결여한 상태가 아니라, 그 몸을 본 사람들이 ‘비정상’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할 때 비로소 장애가 된다." 170p 사이보그들, 그것이 팔다리가 없는 절단 장애든 뇌의 신경세포나 해마체 손상으로 인한 지적 장애든 어떤 신체 조건의 결여가 ‘필요한 정상성’이 ‘없음’으로 연역되는 것은 사실 장애인들을 깍두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놀이터에서 몰아내는 것이다. 비장애가 정상성의 규범이 되고 장애인들은 결함을 지닌 울타리 밖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장애인들은 분명 다르다. 그러나 다르지만 동등하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에게서 결여란 낙인을 지우고 고유성이란 글자를 새겨야한다. 그리고 표준이란 기준은 재정립 돼야한다. 직장에서의 능력 부족, 일시적인 건강 상실, 친구나 지인에게 빚을 지게 되는 일 등 비장애인들 역시 어떤 상황에서든 사회가 요구하는 1인분, ‘정상성’에서 밀려나는 경험을 안게 된다. 이 정상성이란 누군가 항상 점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깍두기처럼, 우리 사회에서 각자의 고유성에 따라 지니고 있을 때도 잠시 박탈될 때도 있는 것이다. 깍두기는 비장애와 장애로만 구분 지어져선 안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건실한 미래 사회를 이룩하는데 반석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기술의 발전은 이러한 논의를 숙고하고 있지 않다. 이를 본인 스스로 장애를 안고 있는 저자들 김초엽·김원영이 자신들의 경험을 밑바탕으로 명징하게 밝혀 주었다. 2. 누구를 위하여 기술은 발전하나 청각 장애인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정상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청력과 목소리일까, 비장애인들과의 원활한 소통일까. 절단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진물이 나고 염증이 생겨도 정상인 같아 보일 수 있는 의족일까, 그저 원하는 목적지로 편하고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 보조기구일까. 저자들이 던진 질문은 필자에게 큰 부끄러움을 안겼다. 작품에서 저자 김초엽은 일명 ‘감동 포르노’ 사례에 대해 소개했다. 장애인들을 위한다는 과학 첨단 기술들은 광고에서 흔히 인간적인 기술을 표방하며 장애인들에게 장애를 치료하는 장면을 선보인다. 음성 합성 AI 기술은 농인의 가족들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구강 구조를 분석해 농인에게 목소리를 선사했다. 가족들이 농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우는 순간 사람들은 기술에 대한 예찬과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이 광고는 과연 농인을 위한 것일까. 정작 농인들은 광고 속의 농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청각 장애인들이 수술로 갑자기 청력과 목소리를 얻는다 해도 오히려 그 낯섦과 이질적인 감각은 두려움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기술 광고는 장애 당사자가 아닌 철저히 주변 가족과 이를 지켜보는 비장애인들의 감동을 위해 연출됐던 것이다. 기술이 장애인들에게 비장애인들이 바라는 정상성을 선물했을 뿐이라는 저자의 비판은 나에게 닿는 순간 큰 꾸짖음이 되었다. 스스로는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다. 현재의 첨단기술 발전이 도모하는 장애의 치료가 맹목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던 것이 장애인에 대한 얼마나 알량한 선심이었던가. 그동안 기술은 장애인들의 발 앞에 정상성이란 선을 긋고 그들을 그 선 밖의 존재로 만들어버리고 있었다. 정작 장애인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기능 완성이 아닌 효율적인 환경이었음에도 기술은 편무적인 태도를 견지해온 것이다. 저자들은 장애-기술을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는 정상성 규범을 따르는 보조기술이 반드시 장애 당사자들에게 더 나은 일상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술과의 결합의 선두에 서 있는 장애인들, 사이보그의 현실은 일방적으로 비장애인들에 의해 덧칠되는 낙인으로 뭉뚱그려지고 있었다. 3. 사이보그의 현현, 미래기술의 재설계 저자 김원영은 많은 것이 자동화되고 인간 행위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늘 거기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주는 존재가 장애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 사회가 점점 카지노 도박장처럼 사용자들이 삼매경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매끄러운 ‘심리스 스타일’로 설계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1970년대 이전엔 카지노에서 잭팟이 터지면 관리인이 와서 확인을 하고 나서야 게임을 이어갈 수 있었고 사용자는 그 사이 이음새가 떠 도박을 멈췄다고 한다. 저자는 어떤 시스템의 빈틈이 이와 같은 이음새로 발견된다고 주장했다. 마치 우리가 알고리즘의 추천으로 끝없이 스낵 영상을 이어볼 때 핸드폰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람이 뜨면 그 연쇄에서 빠져 나오는 것처럼, 장애인은 기술 발전이 끝없이 점철되는 미래 사회에서 그것이 놓치는 부분을 조명시키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장애인, 즉 사이보그를 통해 미래 기술의 발전 방향은 허점이 발견됐지만 동시에 사회를 위해 보다 성숙해질 기회를 얻었다. 사이보그의 현현은 미래 기술 재설계의 이정표가 된 것이다. 때론 장애인에게 로봇 외골격을 주는 것보다 휠체어를 위한 경사로를 설치하는 것이 더 필요한 것처럼 기술의 발전 방향은 좁은 가늠쇠 사이로만 과녁을 바라보아선 안 된다. 저자들은 기술이 장애인들로 하여금 먼 미래의 ‘희망’에 기대어 정상적인 몸을 가질 날을 기약 없이 기다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공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외쳤다. 이러한 장애 중심적 기술 과학의 숙의는 AI 테크놀로지 등의 첨단과학이 비약적인 발전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필요한, 발전 과정에서 포용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에 이바지해야함을 일깨워준다. 깍두기 놀이에는 한 가지 유의사항이 있다. 다른 이들이 깍두기를 그저 ‘약자’라는 시선에 가두고 모든 게임에서 깍두기로 고정시키는 순간 깍두기의 몰입과 재미는 시들시들해진다. 놀이에서 마치 유령 같은 존재로 고립되며 군중 속의 고독이란 듣기 싫은 말을 체감하게 된다. 결국 깍두기라는 역할을 만들어낸 의미가 유야무야 돼버린다. 미래 기술은 이 약자라는 시선을 거둬들일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약자가 약자로만 여겨지지 않게, 깍두기가 되는 조건이 장애만이 아닌 각자의 특수성이란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되어야 한다. 여러 주체들이 상호작용하며 서로가 서로의 취약점을 존중하고 돌볼 수 있도록, 그 과정에서 사이보그들이 사이보그라는 낙인만으로 소외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래 기술은 장애인 같은 소수자들을 받아들이는 깍두기 문화를 조성해내는 동시에 그 소수자들이 깍두기 자리에 고정되지 않도록 해방시키는 것이 나아가야 할 길이자 주어진 임무이다. 최규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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