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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당선작(대학일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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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4 19:33

사이보그가 되다 - 지금, 여기, 이곳의 우리에 대하여

  1920년대 뉴욕, 한 여성이 더위를 피해 호텔 카페로 들어선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그녀는 어쩐지 자신의 얼굴을 되도록 가리려는 듯한 어색한 몸짓을 보인다. 흑인과 백인의 출입 가능 구역이 구분되어 있던 그 시절,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살고 있음에도 백인들이 출입하는 호텔에 들어선 것 자체를 죄스럽게 여기는, 그리하여 챙 넓은 모자로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성을 가려보려는 흑인 여성. 그런데 그 여성을 멀리서 알아본 또 다른 흑인 여성 친구가 그녀에게 알은체를 해온다. 오래 전부터 외모를 백인처럼 꾸미고 남편에게까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긴 채 결혼했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은 스스로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었던 부끄러움을 발견하게 되는 동시에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며 주류 사회 속에 편입되어 살아가고 있는 친구에게 묘한 혐오감을 느끼면서 갈등하게 된다.
  이 영화의 제목은 『패싱(Passing)』이다. 지금도 많은 억눌린 소수자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소외받기보다 어떻게든 주류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특성을 지닌 자로 자신을 가장하여 살아가는 패싱의 길을 택하곤 한다. 나와 다른 것을 쉽게 용납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 더군다나 그 다름이 많은 이들에게 약점이나 잘못된 것으로 인식되기 쉬운 문화 속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이 숨 막히는 하루하루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번에 『사이보그가 되다(김초엽, 김원영 지음)』를 읽기 전까지 나에게 ‘사이보그(Cyborg)’라는 것은 공상과학 영화나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상의 비인간적 존재를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어 왔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이야기, 인간이 아닌 비인간의 이야기, 현재가 아닌 미래의 이야기로 여겨져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기계와 결합한 신체가 맞닥뜨리게 되는 현실적 삶의 이야기를 읽어나가게 되면서 나는 비로소 이 단어가 우리 삶에 어떤 식으로 광범위하게 스며있는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가 그간 접해온 SF 문학 속 사이보그들의 이야기는 그동안 주류 사회에서 용인 받지 못한 소수자로서의 삶에 대한 냉철한 은유일 수 있다는 것도. 
  얼마 전 엄마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요즘 들어 자존감이 떨어지는 느낌을 자주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거울을 보고 눈에 이상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안과에 갔다가 백내장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터에 어느 날 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병원을 찾았더니 청력이 많이 떨어져서 머지않아 보청기를 착용해야 할 것 같다는 진단까지 연이어 받게 된 탓이었다. 신체 기능은 나이가 들면서 퇴화할 수밖에 없고, 언젠가는 돋보기나 보청기, 휠체어 등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누구에게나 온다. 오랜 세월 동안 별 문제없이 사용해오던 신체였기에 보조장구의 도움을 필수적으로 요하는 어떤 시기가 도래했을 때 많은 이들은 그것을 ‘결핍’이자 ‘박탈’로 느끼게 된다. 일견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른바 ‘정상’ 범주에서 벗어나는 신체적 기능에 대한 이질감과 공포, 혐오가 유독 다른 사회에 비해 더 강한 것이 아닌가 싶다.
  TV 브라운관에 나오는 배우들의 얼굴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마치 다리미질이라도 한 것처럼 주름 하나 없이 매끈하다. 나는 매번 그러한 억지스러운 소거 상태를 목격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사회의 강박을 읽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나이가 고스란히 반영되는, 그리하여 무언가가 낡고 퇴화되고 덜그럭거리는 신체보다는, 흔히 "나이를 거꾸로 드시는 것 같아요."라는 말을 칭찬으로 여기는 데서 볼 수 있듯 세월까지도 거스를 수 있는 건강성과 지치지 않는 활력을 지향한다. 젊음과 건강함을 미덕으로 여기는 누군가의 가치관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대다수의 준거나 지향점으로 자리 잡을 때, 그것에 부합하지 않는 신체를 백안시하게 되는 풍조 역시 뚜렷해진다는 점은 큰 문제가 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농인이 AI 기술을 활용해 청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목소리를 얻어 의사 전달을 하는 과정을 담은 광고를 아무런 의심 없이 감동적으로 감상했었다. 그런 식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이 기술을 통해 신체의 ‘결핍’을 ‘극복’하는 구도의 감동 포르노라 할 수 있는 숱한 광고들을 보면서도, 정작 그것이 장애인 본인을 정말로 위하는 기술인지는 한 번도 반문해볼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농인들이 원하는 것이 타인과의 원활한 소통이지, 과연 청인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까? 듣지 못하는 사람이 소리를 듣게 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과연 축복일까 혼돈일까? 엄밀히 말해 예의 광고들에서 우리가 장애인들에게 ‘선물’하고, ‘기적’이라 칭송하고, ‘감동’을 받았던 것은 장애인들 입장에서의 선물이자 기적,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라기보다 비장애인들이 철저히 그들만의 입장에서 누리는 기쁨이자 경탄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철저하게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장애를 다루게 된다면, 장애인들의 신체는 항상 무언가가 결핍되거나 부족한 부정적 상태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언급한 건강성에 대한 ‘비정상적’ 지향이 압도적 문화로 자리 잡은 사회에서는 장애가 항상 감추어져야 하고 극복되어야 할 조건이 된다. 동화 속 혹부리 영감이나 뺑덕어멈 등의 캐릭터는 일반적이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은 신체를 도덕적 악함으로까지 결부 짓는 지독한 편견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동화 『피터 팬』 속 후크 선장의 갈고리는 얼마나 공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던가? 후크 선장이 현대에 살았다면 동네 이웃이나 직장 동료 모두의 눈에 띔으로써 더욱 소외를 유발하는 보조장구를 결코 착용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현대의 의족이나 의수, 보청기 등은 그것을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정상’의 범주에 가깝게 보이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장구들은 장애인들의 현실적, 기능적 필요보다 비장애인들이 시각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보청기를 착용한 농인들은 비장애인들로부터 장애를 인식 받지 못하게 되고 그에 따라 장애에 대한 배려를 받지 못할 가능성 역시 커지게 된다. 더군다나 정신적 장애나 만성 통증 등 그 특성상 눈에 띄지 않는 장애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가 더욱 힘들다. 경계성 지능의 경우에는 아예 장애 판정을 받음으로써 그에 따른 사회적 지원을 받는 길조차 막혀 있다. 많은 장애인들이 ‘정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를 강요받는 동시에, 눈에 띄지 않는 장애를 겪고 있는 경우에는 그 진위를 의심 받고 추궁 받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꼭 장애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지하철 임산부 지정석을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란과 의심, 충돌의 양상을 보고 있노라면 눈에 띄지 않는 신체적, 정신적 불편함이 얼마나 이중의 소외 구도에 놓여 있는지가 더욱 명백해진다. 그럼에도 많은 장애인들이 굳이 자신의 장애를 드러내거나 증명하기보다 ‘패싱’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그들이 장애를 감추었을 때 겪는 불편보다 장애를 드러냄으로써 받게 되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의 고통이 훨씬 큰 탓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들은 신체의 기능을 보완하거나 증강시켜줄 수 있는 보조장구들을 항시 착용하여 살아가는 이 땅의 장애인 사이보그들이 겪는 매일 매일의 현실적 고통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드러낸다. 스티븐 호킹이나 이상묵 교수처럼 장애에도 ‘불구하고’, 신체와 기술의 결합을 통해 그것을 ‘극복’해내는 영웅적 존재로 칭송받는 존재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일상에서 마주치는 평범한 장애인들은 그저 기계와 결합하여 생활해나가는 기괴한 사이보그로 취급받기도 한다. 또한 눈에는 매끄럽게 보이는 보조장구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기계와 신체의 결합은 일부 유명 장애인들의 패셔너블한 화보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매끄럽고 순조로울 수가 없다. 
  매끄러운 가죽 의족을 신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에로틱한 사진의 뒤편에는 보철과 절단 부위가 만나는 지점에서 체중을 적절하게 옮기려 애쓰는 보철 사용자의 미세한 근육 운동, 통증을 견디려는 의식적인 노력, 보철을 착용하고도 ‘자연스럽게’ 걷기 위한 훈련, 비가 오는 날이나 한여름, 한겨울의 기온과 습도를 견디기 위해 매일 보철을 관리하는 손길, 짓무르고 살이 부르트는 접촉 부위를 신경 쓰는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돌봄이 자리하고 있다.
  기계와 신체가 오랜 시간 맞붙어 있다 보면 감염이나 짓무름, 부식, 고장 등이 빈번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다. 모든 장애인들이 자신의 신체와 결합된 기계의 작동방식과 원리, 조정이나 수리 방법에 대해 훤히 알고 그것을 자신의 통제 하에서 관리, 보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계는 분명 장애인들의 삶의 어떤 부분을 보완해주지만, 어떤 면에서는 끊임없이 구속하고 있기도 하다. 기술 만능주의적 시각으로 기계와 의료 기술의 발달이 모든 장애를 ‘극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신화를 무조건적으로 신봉하는 자세는 매우 위험하다. 이러한 태도는 미래의 기술 발달에 대한 기대를 통해 과학기술 시장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는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정작 현실에서 지금의 기술과 제도로 개선할 수 있는 장애인들의 삶의 여건에 대해서는 눈감게 만들고 그러한 여건을 보완하는 제도의 수립을 유예하게 만드는 변명거리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느낀 점은 사이보그에 대한 담론이 상상 속의 먼 미래나 비인간적 존재들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이들의 처절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이나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들처럼, 인간으로서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주류 사회 속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기이한 존재들, 소외된 소수자들에 대한 수많은 SF 문학과 영화들은 ‘다름’을 용인하지 않는 폭력의 역사에 대한 은유일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아프게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 지하철 삼각지역에서는 이동권의 보장을 요구하기 위해 시위를 벌이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그것을 강제적으로 억압하는 공권력 간의 충돌이 벌어졌다. 세계인들이 사랑하는 도시, K컬처와 함께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도시 서울의 지하철 역사에 아직도 교통약자를 위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곳이 많으며 작은 체구를 지닌 사람이나 휠체어를 탄 사람, 유모차를 끌고 가는 사람들이 건너기 힘든 전동차와 승강장 간 틈새가 존재하는 곳이 많은데도 이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를 강제로 진압해야 할 이유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시위를 방해하기 위해 수많은 경찰 인력이 투입되고, 시위 장소가 되는 역사에 대한 무정차 운행을 강행하고, 역사를 찾은 장애인들을 향한 강제 퇴거 명령을 쉼 없이 역내 방송으로 내보내는 현실은 너무도 부끄러운 인권 의식 수준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이로써 세계적 도시로 발돋움한 서울은 그저 화려하고 매끄러운 모습을 자랑하기 위해 그 매끄러움 속의 균열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소수자들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타자화 하는 곳인지가 명백해졌다. 전장연이 요구하는 사항들은 비단 장애인들뿐 아니라 신체적 불편이 삶의 삐걱거림으로 이어지는 모든 교통약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인프라의 구축은 소수자와 약자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평등하게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임을 이 사회의 위정자들은 줄곧 쉽게 망각하곤 한다. 많은 시민들이 당장의 작은 불편보다 우리 사회가 약자를 짓밟는 방식에 더욱 큰 충격과 상처를 받고 있다는 것도.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대성당』에는 오래 전 아내가 일을 통해 알게 된 나이 지긋한 시각장애인 벗이 화자의 집에 우연한 계기로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종일관 아내의 친구를 편견 가득한 떨떠름한 반응으로 대하던 화자는 TV에 나오는 대성당의 장면을 그에게 설명해 주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한다. 그는 번연히 두 눈을 뜨고 대상을 바라보고 있었으면서도 스스로가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제대로 설명할 언어를 가지고 있지 못했음을 순간 깨닫게 된다. 아내의 친구는 당황하는 화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채로 대성당을 찬찬히 종이 위에 그려볼 것을 권유한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서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대성당』의 마지막 장면은 어떤 개안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눈을 뜨게 된 주체는 아내의 시각장애인 친구가 아닌, 화자 자신이다. 이 장면은 편견과 무지로 인해 자신과 다른 세계에 눈 뜨기를 거부하였던 이가 새롭게 바라보고 건너가게 된 세계 속에서 비로소 상대방의 마음, 그리고 삶의 소중한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뭉클한 순간을 보여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건강과 질병, 정상과 비정상 등으로 세계에 이분법적 금을 긋고 경계를 지어 살아가는 비좁고도 비뚤어진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모든 소수자들이 겪는 고통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땅의 사이보그들이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첨단의 의료 기술이나 장비보다도, 각자의 삶이 지닌 다종다양한 여건을 이해하고 지금, 여기, 이곳에서 서로의 손을 포개어 함께 사는 미래를 그려나가는 모두의 마음일 것이다.        

                             구 설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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