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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회 인문페스티발 인공지능인문학 추천도서 독후감 경연대회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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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8 19:15


과학은 진보를 약속하지 않았다

- ‘메타버스 사피엔스를 읽고

독립적 사고만이 진실입니다.1

전 세계 역사를 통틀어서 지금처럼 진실이 넘치던 시대가 있었는가. 정보의 바다를 항해하는 21세기 해적들에게는 저 문장만한 보물이 없다. 글을 읽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 많은 요즈음이다. 이민자들로부터 제 정체성을 위협받는 선진국 국민은 물론이요, 중국화를 경계하는 홍콩도 예외는 아닐 테다. 서로 다른 목적으로 각자의 현실을 유지하기 위해, 인공지능 혹은 메타버스의 힘을 빌린다. 
반면 나는 인공지능이나 메타버스 같은 거창한 과학의 산물 따위와는 무관한 인생을 살았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했다. 인공지능을 사용하는데 주력한 삶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면인식으로 잠금을 풀면서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몰랐다. 동물의 숲을 플레이할 때, 메타버스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누군가가 나의 무지를 향해 상식을 걸고 넘어질 때면, 난 자본주의 사회 살아가는 MZ세대답게, 먹고사니즘 내세우며 인공지능이 내 밥 먹여주냐 반박했다. 저자가 지적한 와해된 공론장의 걸어다니는 사례가 바로 여기 있다. 이런 내가 인공지능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를 설명하기 위해선,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해당 목소리는 우산 혁명의 주역, 조슈아 웡이다. 나는 시리나 카카오 미니 따위가 아니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으로 인공지능을 만났다. 아니, 인공지능의 존재를 처음으로 인식했다.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2  

‘사피엔스’와 ‘메타버스 사피엔스’의 저자는 인간을 상상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같은 상황이 벌어져도, ‘우리 팀’이라고 상상하는 존재에게 더 호의적이라고 말이다. 요컨대 ‘안으로 굽는 팔’은 뇌과학적인 현상이란 것이다. 우린 이 상상력으로 신을 믿고, 돈을 믿고, 국가를 믿고, 인권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경우엔 한 가지 더 해서, 홍콩을 믿었다. 
나도 조슈아 웡 나이에 촛불 혁명을 나갔다. 다른 국가에서, 다른 시기에, 다른 시위에 나갔음에도, 나는 왜인지 조슈아 웡을 ‘우리 팀’의 범주에 넣고 있었다. 촛불 혁명의 기억이 없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도, 홍콩 민주화 운동은 결코 타자의 이야기가 아닐 테다. 적어도 국가를 믿고, 민주주의를 믿는다면 말이다. 
홍콩 민주화 운동은 2019년 초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하며 일어났다. 당시 연이어지는 대규모 행진들은 평화롭고 비폭력적이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경찰이 최루탄과 고무탄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때 시위대가 맞대응하며 폭력 사태가 발생했는데, 중국 당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해당 시위를 외부 세력이 부추긴 폭동으로 규정하고 더욱 강경한 진압을 시도한 것이다. 어쩐지 한국의 과거사가 오버랩된다고 하면 비약일까.
과거 한국과 현재 홍콩의 차이점은 인공지능의 유무뿐이었다. 중국이 인공지능 기술을 가지고 안면인식 시스템을 악용했다. 복면 금지법을 발의하며, 시위에 나간 사람들의 안전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984같은 허구적 디스토피아 소설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이 누군가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최근 유행한 사진을 그림으로 바꿔주는 AI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렇게 사진을 학습한 데이터는 위구르와 홍콩을 탄압하는 기술로 쓰일 것이다. 과연 나는 고객이 아니라 상품이었다. 겨우 강아지와 머핀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인공지능은 가히 ‘빅 브라더’라고 불릴만 했다.

방향타를 조종하지 않더라도 배는 앞으로 나아간다.3 

뒤늦게 인식하게 된, 인공지능은 생각보다 내 삶에 깊게 침투해 있었다. 내 핸드폰에 내장된 시리는 물론, 일어나면 날씨를 알려주는 카카오미니, 내가 강의를 들을 때 켜두는 네이버 클로바. 이 모든 것이 ai였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연상케하는 나의 막연한 낙관이 사회학적 파상력을 겪는 순간이었다.
나는 안면 인식으로 핸드폰의 잠금을 풀면서, 이 인공 지능이 누군가를 탄압할 수단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안면인식 기술로 콘서트에 온 범죄자를 잡았다고 했을 땐 콘서트를 보러온 범죄자가 우스웠지만, 범죄자의 범위를 넓힌 중국을 보고는 더이상 웃지 못했다. 해외에서 이따금 말하는 cctv에 대한 불안이 바로 이것인가 싶었다. 이것에 기술 혁신이라고 이름 붙여도 되는가? 오히려 인권 유린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절망감에 빠져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영국 bbc 다큐멘터리에서 홍콩 시위자를 보호하기 위해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얼굴을 바꾼 것이다. 덕분에 얼굴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모두 전달하면서도 안전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기술로 정반대의 행위가 가능한 것이다. 
그 뿐이 아니다. 전세계 곳곳에서 메타버스인 ‘동물의 숲’으로 홍콩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가상의 현실 속에서 일어난 시위는 과연 기발했다. 안면인식 문제를 해결한 동시에, 몸이 불편한 사람들과 해외에 거주하는 사람들까지 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효과도 상당했는지, 동물의 숲이 중국에서 금지 게임으로 지정되는 결과까지 초래했다. 
나는 이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움을 겪었다. 우리의 삶에 침투한 이 과학의 산물들을, 난 도대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긍정적으로? 아니면 부정적으로? 이젠 지적 허영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내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에 대해 알아야만 했다. 내 걸음의 종착역이 디스토피아인지, 유토피아인지 궁금했다. 이것이 먹고사니즘을 가진 내가 ‘메타버스 사피엔스’를 펼친 이유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4 

저자는 마치 탐정처럼, 우리가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건들의 이유를 파헤친다. 코로나를 포함한 사회, 문화, 철학의 관점에서 현 사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탈세계화, 정체성의 위기, 기후위기, 탈현실화, 메타버스의 예시처럼 말이다. 덕분에 난 연관없어 보이는 이 사회현상들을 유기적으로 정리해 맥락화할 수 있었다. 저자가 총 7챕터에 걸쳐 하고자 한 말은 모두 한 문장으로 귀결한다. “‘나’와 ‘내 사회’를 이해하기 이전에, 애초에 ‘나’와 ‘내 사회’란 것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인공지능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했던 내게, 이 물음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난 중력의 존재를 처음 안 사람마냥, 지식의 확장이 아니라 쇄신을 느꼈다. 미래가 디스토피아인지, 유토피아인지만 궁금했던 내게, 저자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당장 먹고 사는데 바빠, 주변을 돌아본 적 없는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나를 위해, 저자는 더 쉬운 문제를 내주었다. 질문의 가장 작은 단위인, ‘나’에 대한 관념을 어떻게 정의했는지 물었다. 가장 먼저 떠오른 답은, 육신의 종속된 무언가였다. 이 뻔한 답을 저자는 예상이라도 한 듯이,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부정했다. 인간은 성장을 하면서 신체 형태가 계속해서 변화는데, 그럼에도 ‘나’는 ‘나’라고 확신할 수 있지 않냐며 말이다. ‘뉴런’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연속적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단 친절한 설명은 덤이었다. 이 뉴런이라는 것이, 초기형태는 고속도로 수준으로 단순한단다. 그러니까 연결 구조의 대부분은 주변환경과 상호 작용을 통해 후천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상대성’에 집중했다. 그러면 인간이 자꾸만 ‘우리 팀’을 만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고, 착시를 겪는 이유가 보인다. 현실을 재구성하는 뇌에겐 절댓값이 없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는 ‘타인’으로부터 올 수 밖에 없다. 
키가 170cm인 사람 a가 있다고 하더라도, 주변인의 키에 따라서 a의 정체성이 달라진다. 소인국에선 키가 크다는 정체성이 생기고, 거인국에선 그 반대다. 만약 모든 사람이 키가 같다면, 키는 더이상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 우리가 사람을 소개할 때 머리가 하나 있다고 얘기해주지 않듯이 말이다. 이처럼 자아정체성은 타자와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 타자의 존재로 내가 완성된다.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것이 퍽 낭만적이다. 
다만 그 누구보다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하는 21세기 대항해시대에서, 탈세계화가 대유행인 것은 아이러니하다. 높아지는 국경선과 브렉시트를 비롯한 민족주의는 정체성을 지키는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불편한 편이 더 좋아요. 

우리는 우리의 종착역이 유토피아일 것이란 막연한 낙관을 펼치곤 한다. 오늘이 중세보다 진보한 것이 그 증거라고 말이다. 실제로도 유아사망률은 눈에 띄게 줄었고, 많은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었으니, 이는 꽤나 그럴싸하게 들린다. 신보다 과학을 믿는 세상이다. 그런데 신과 과학이 정말 다른가? 종교적 세계관에서 과학적 세계관으로 단어만 바뀌었을 뿐,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은 중세와 같다. 
인간이 만들어낸 가공의 신이 중세 인간을 지배하는 것처럼, 편의를 위해 만든 과학이 오늘의 우리를 통제하는 모순 사회다. 생각해보면 과학은 언제나 타인을 통제하기 쉬운 방향으로 진화해 나갔다. 힘으로 굴복시키는 게 아니라 스스로 복종하도록 유도한다. 진보한 오늘이라고 자부하지만, 중세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어보인다.
오히려 중세의 종교보다 현재의 과학이 무섭다. 문제를 쉬쉬하는 사회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회는 차이가 크다. 저항할 수 없는 ‘1984’보다, 저항의 필요를 못 느끼게 하는 ‘멋진 신세계’가 무섭다. 생각해보면 위생의 혁신이라고 느껴지는 화장실은, 여성과 남성을 제외한 제3성별에게 통제를 가한다. 여자와 남자 중 고르라고 계몽주의의 협박을 한다. 생각해보면 전세계적으로 미의 기준이 비슷해져가는 건 기이하다. 백인의 시선으로 만든 작품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시선이었다고 믿는다. 그 어떤 교육으로도 이렇게는 못했을 테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 스스로를 잘 모른다. 어디까지가 나의 생각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생각인가. 무의식은 마치 모태신앙 같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체화된다는 점이 꼭 그렇다.  한 번쯤은 인터넷에서 재생산되는 이데올로기나, 자신이 암기한 학문을 떠나서 독립적인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것이 정보의 홍수에서 난파되지 않는 방법이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에서의 암기는 후퇴를 부를 뿐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것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기 전에 해야할 일이다.

 과학은 진보를 약속하지 않았다. 윤리는 새로운 발명품의 증정품이 아니다. 손 놓고 있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에선 새로운 기준을 정립해 나가야 한다. 결코 생각하기를 멈춰선 안 된다. 민주주의는 당연하지 않다. 우리는 인류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아주 예외의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목소릴낸 덕에 지금까지의 역사가 존재할 수 있었다. 새로운 미래에 들떠서 이 가치를 잊어버리지 말자. 노동 윤리가 없었기에 죽어나간 역사를 반복하고 싶진 않다. 인공지능 윤리를 개발자 개개인에게만 의존한다면, ‘1984’ 혹은 ‘멋진 신세계’가 우리의 새로운 현실이 될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김성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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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웡
2 1984
키르케고르
데카르트
5 멋진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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