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여러 번 보고도 볼 때마다 새로워서 꾸준히 다시 보게 되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마츠모토 레이지(松本零士, 1938~2023)의 SF 만화 <은하철도 999>가 그것이다. 유년기에 보았던 <은하철도 999>는 그저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몇 번이고 다시 와서 나를 툭 건드린다. 서늘하고 처연한 겨울밤을 떠올리게 하는 이 만화는 무려 1970년대에 제작되었다. 1970년대에 상상한 222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또, 2023년에 상상해 보는 2220년대는 어떤 모습일까? 옴니버스 형식으로 전개되는 <은하철도 999>는 인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들)의 여정을 보여주며 다양하기도 하고 곤혹스럽기도 한 철학적 질문을 던지거나 던지게 한다.
<은하철도 999>의 시간적 배경인 서기 2221년, 지구의 우주 교통기관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우주 철도망은 은하 끝까지 확장됐고 우주 열차가 매일 지구와 행성 사이를 왕복한다. 지구의 지상에는 초근대도시인 ‘메갈로폴리스’가 형성되었고, 온도가 조절된 공간에서 인간들은 추위와 더위를 모르는 쾌적한 삶을 누린다. 심지어 2221년의 인간들은 기계 부품만 교환하면 천 년은 물론 2천 년도 살 수 있는 몸을 가졌다. 그러나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은 기계 몸을 살 수 있는 부자들뿐이었고 기계 몸을 살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메갈로폴리스에서 쫓겨나 비참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가난한 이들 사이에서 ‘우주의 어느 별에 가면 기계 몸을 무료로 준다’, ‘그 별에 가려면 은하 초특급 999(이하 ’999‘로 표기)를 타면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999를 타기 위해 호시노 테츠로와 그의 어머니는 메갈로폴리스로 향하지만 테츠로는 가난한 사람을 재미로 사냥하는 기계 백작 무리에 의해 어머니를 여의고 기계 백작 무리를 소탕한 뒤 수배자 신분이 되기에 이른다. 그러다가 신비로운 여인 메텔의 도움으로 999에 탑승하게 된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 덕분에 우리 은하를 초월해 버리는 우주적 차원의 여행이 가능해진 미래 세계에서 테츠로와 메텔은 다양한 별에 정차하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존재들을 만난다.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거나 형체가 없거나 기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영생을 얻기 위해 기계 인간이 되고자 하는 이들은 많은 돈을 낼수록 인간과 유사한 모습을 띨 수 있는데, 이 점은 퍽 아이러니하다. 또 흥미로운 점은 기계 인간이 되기 위해 떠난 여정에서 빈부 격차와 계급의 문제, 그릇된 꿈을 꾸는 정치적 지도자, 기계주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서술자의 비판적 시선이 반복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기계 인간이 되지 못한 테츠로의 어머니는 죽어서 기계 백작에게 박제되고, 어느 행성에서는 관광수익을 높이기 위해 군인들을 영원한 전투로 내모는 정치적 지도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한편 ‘거울 별’에는 999에 탑승하기 위해 어렵게 모은 재산을 사기당한 형제가 등장하기도 하고, 투명한 바다 같은 어머니 별에서 생을 마감하는 기계 인간 아르테미스도 등장한다. 아르테미스를 보살피고 그가 죽은 뒤 진심으로 명복을 빌어 주는 테츠로에게 어머니 별은 고마움을 표하고 사라진다.
999를 둘러싼 일련의 에피소드를 파고들수록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감정은 인간만의 것인가’, ‘비인간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근원적 질문이 떠오른다. 포스트휴먼 담론이 우리 시대를 포착하는 주요 담론으로 대두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포스트휴먼에 대한 성찰은 이전부터 꾸준히 있어 왔다. 그중 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은하철도 999>는 소위 ‘인간다움’이라고 불려 왔던 다양한 가치들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그것이 정말 인간만의 전유물인지 묻는다. 수많은 이들이 바란 영생의 문제에 대해서도 ‘끝없이 이어지는 삶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주인공 테츠로가 만나는 인간, 기계 인간, 그들의 흔적, 행성 등 우주 내 다양한 존재들은 저마다 취약한 구석을 간직하고 있으며, 접점을 이루어 만나거나 서로에게 영향을 주곤 헤어진다. 이들 간의 관계는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먼 감수성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들 중 누군가가 죽음 속으로 들어갈지라도 우주 내 존재들 간의 상호 연결성은 손쉽게 폐기되지 않는다. 로지 브라이도티가 말한 대로 ‘개념을 넘어서는 비인간’인 죽음은, 최종의 빼기로 인식될 수도 있으나 관점을 달리하면 “흐름과 에너지와 영속적 되기의 창조적 종합”1)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죽음은 혼자만의 종말이 아니라 삶과의 연속체로 이해될 수 있다.
팬데믹 가운데 출간된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묻는다. 지금은 도대체 어떤 세계냐고. 그에 따르면 세계 안을 거소로 삼지 않고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것은 지속과 공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을 살 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 다양한 자리에 서 있는 주체들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인정하고 존중하기 위해, 지금-여기의 우리에게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대해 낙관도 비관도 하지 않으면서 제3의 자리를 열어나갈 방법이 필요하다. 함께-되고 함께하고 함께-살기 위하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면 어떨까. 분별없는 종합도, 주체성에 대한 과격한 부인도,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주체성을 재기입함으로써 그것을 답습하는 일도 이 우주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을 창의적으로 재구성하고 비인간 주체들과 복잡하게 어우러질 수 있는 융합의 용기가, 계급과 젠더, 국가와 지구를 넘어서는 우주적 연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브라이도티의 말대로 “우리는-(모두)-여기에-함께-있지만-하나가-아니고-똑같지도-않다”3).
<은하철도 999>는 낯선 별에서 만나는 각각의 곤혹 앞에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은 누구도 확신하기 어렵다. 질문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복잡한 질문에 나름의 방법으로 답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기꺼이 복잡하고 능동적인 존재로 재구성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아닌 것과 아직 아닌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이라고 믿어지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고 모든 경계를 횡단하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한 노력에 ‘우주적 연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 이름이 오래전부터 품어왔으나 미래의 지도를 그리는 나침반이 될 수 있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생성적일 것이다. 분열과 접속, 비판과 창의는, 패배하지 않고도 연대할 수 있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비판적 인문학, 인공지능인문학과 함께하는 길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당신의 열차는 우주의 어떤 레일 위를 달리고 있는가?
황선희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경란 역, 아카넷, 2015, 170쪽.
2) 주디스 버틀러, 『지금은 대체 어떤 세계인가』, 김응산 역, 창비, 2023, 56쪽.
3)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지식』, 김재희·송은주 역, 아카넷, 2022,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