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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포스트휴먼, 인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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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1-25 21:21

4차 산업혁명, 포스트휴먼, 인지혁명 
 



 1. 의사소통과 인지의 확대 

 4차 산업혁명이라는 시대변화는 인간의 극적인 유전자 변화에 기인하지 않는다. 대부분 혁신은 개인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조직에 어울린다. 조직에는 반드시 혁신이 필요하지만, 그 혁신은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혁신에 실행하는 조직원이 있는 반면에, 현재에 안주하는 조직원도 있다. 혁신을 실행하는 조직원이나 리더는 그것을 위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혁신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고자 한다면, 리더가 직원들에게 어떤 혁신이 가장 가치 있는지를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여기에 섬광 같은 통찰은 통하지 않는다. 따라서 직원들은 혁신을 일으키려고 하는 분야에 대해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콜빈, 2010, p.244) 결국은 유전자와 같은 생득적인 인자보다는 리더의 가치와 구성원들의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리더가 제시하는 가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지향할 지점이다. 구성원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리더가 제시한 목표에 모두 동의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기여한다.  

 인지 혁명이 혁명이라고 했을 때는, 개인의 인지적 한계가 극적으로 극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언급하지만, 하라리는 그 혁명이 인간의 유전적 변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의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오히려 인간의 인지적 한계는 자연과학의 연구를 통해 더욱 분명해졌다. 인간은 동물들보다 인지능력은 뒤떨어진다. 결국, 협력적 정보 수집과 집단적 해석이 그 인지적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 된다. 하라리가 말하는 의사소통은 그 수단이 기능할 수 있게 하는 논리적 기제를 마련해준다. 한 인간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경험할 수 없을뿐더러, 그 경험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경험이 오롯이 기억되거나 보편타당한 지식으로 축적될 수도 없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제기된 집단 지성은 지금은 의사소통의 결정판으로 인류에게 다가선다. 인터넷이 그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백과사전 역시 인터넷 사용자가 편집할 수 있다.

2. 인지혁명과 매개된 경험 

 데이비드 와인버거(David Weinberger)는 지식의 확산이 링크에 있음을 주장한다. 그는 "지식이 항상 특정 형식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개발되고, 특정 형식의 링크들을 통해서 유지되어온 맥락 안에서 생겨났다"(와인버거, 2014, p.310)고 말한다. 이 링크를 통해 지식이 확산하는 양상은 종이에서 인터넷의 시대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다음 언급을 보자. 

하지만 인터넷 시대에는 전문을 싣는 것이 가능해졌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참고도서들 즉 링크된 도서로부터 자신의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문장을 발췌하고 인용한다. 하지만 저자는 독자가 링크를 통해 순식간에 그 자료들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책에 발췌·인용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을 읽어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링크들은 저자의 통제력을 약화시킨다. (와인버거, 2014, p.311) 

"링크들은 저자의 통제력을 약화시킨다"는 말에 주목하자. 이제 앎의 담론은 인간의 인지적 능력의 확장뿐만 아니라 지식 수용방식의 변화에도 결부된다. 의사소통 방식은 협력을 통한 인지혁명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식 수용방식의 변화는 말에서 문자로 이행과 같은 것을 말한다. 월터 옹(Walter J. Ong)은 이에 대해 '인간 의식의 변형'을 가져왔다고 평한다. 

원시적인 혹은 일차적인 구술성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쓰기에 의해 민들어진 새로운 세계를 한층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즉 그러한 세계가 실제로는 어떠한 것인가, 그리고 문자에 익숙한 인간이란 실제로 어떠한 것인가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된다. 문자에 익숙한 사람들이란 선천적인 능력보다는 쓰는 기술에 의해서 직·간접적으로 구조화된 힘에 힘입어 그 사고과정을 형성시킨 인간을 말한다. 문자에 익숙한 정신은 쓰기가 없었다면 실제로 무엇을 쓸 때뿐만 아니라 말하기 위해서 보통 생각을 간추릴 때조차도 지금처럼은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쓰기는 어떠한 발명보다도 더욱 강하게 인간의 의식을 변형시켜 왔다.(월터 옹, 1982, p.123)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의식이 문자의 발견으로 변화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물론, 변화하는 과정은 있었을 것이다. 문자는 권력화 되었고, 구술문화는 힘을 잃는다. 그것은 사용량이나 선호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자가 인간이 가진 인지능력의 한계를 보완하는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었다. 기록은 암기의 부담을 줄여준다. 겪었던 일이나 생각했던 일, 그리고 소통으로 결정된 일들을 암기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구전처럼 전하는 사람의 첨삭을 겪지 않는다. 심지어 텍스트에서 작가는 만날 수 없다. 읽는 사람은 텍스트의 저자와 텍스트에서 만날 수 없다. "텍스트에 직접 반박할 방법은 없다. 완벽하게 반박할지라도 텍스트는 그 뒤에도 여전히 전적으로 전과 같은 것을 계속 말한다."(월터 옹, 1982, p.124) 결국, 텍스트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텍스트는 진리의 문제와 결부된다. 

텍스트는 그 뒤에도 여전히 전적으로 전과 같은 것을 계속 말한다. ‘책에 이렇게 씌어있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진실이다’와 동등한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의 하나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또한 책을 불태워온 까닭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거짓이라고 말한 텍스트가 있으면, 그 텍스트는 그것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거짓이다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 셈이다. 고집스러운 것이 텍스트의 본성이다. (월터 옹, 1982, p.124)

3. 텍스트, 문자문화의 확산과 인지능력

 문자문화가 확산되면서, 인간의 세계 경험은 개인적 인지능력의 확대 없이도 가능하게 되었다. 텍스트는 인간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창고가 되었다. 인간의 인지 능력과는 별개로 텍스트는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조선을 다녀간 몇몇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은 지금에 와서 보면, 서양인들의 시각에서 본 편향된 내용도 많이 담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서양인들에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조선은 텍스트로 접한 조선이다.1) 결국 인간의 인지능력은 실질이 아니라, 재현된 것을 향한 것이 되었다. 그 재현은 언어의 기본적인 속성이지만, 그 재현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기록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 역사가, 기자, 소설가, 시인 등이 그런 사람들이다. 이들은 글로 진실을 전달하거나, 무한한 상상력을 제공한다. 이들의 접점은 단지 텍스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컴퓨터를 개발하고, 코딩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데이터의 시대가 왔다. 데이터는 우리가 어떠한 텍스트에서 얻은 인지적으로 얻은 정보들의 정오를 판별해준다. 다음 한스 로슬링의 언급을 보자. 

내 생각에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다. [...] 언론인도 이를 잘 안다. 이들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서로 반대되는 두 부류 사람들, 반대되는 두 시각, 반대되는 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구성한다. [...] 간극 본능은 분할을 연상케 하지만 알고 보면 완만한 다양성에 불과하고, 차이를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수렴하는 차이며 갈등을 연상케 하지만 사실은 합의에 이르는 갈등이다. 여러 본능 중 간극 본능을 가장 먼저 거론하는 이유는 이 본능이 무척 흔하고, 데이터를 근본적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다.(로슬링, pp.60-61) 

인지혁명은 분명 인류 발전에 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로슬링의 위 언급으로 보면, 인류가 찾았던 진리는 인간의 판단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경험이 쌓은 데이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특히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직업인 언론인도 간극 본능을 가지고 독자들의 간극 본능을 부추길 뿐이다. 인간의 인지는 현대 사회에서 재현된 현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텍스트는 의도와 해석이 엇갈리는 장일 뿐, 진리를 담고 있지 않다. 인지혁명을 바탕으로 한 사고 체계의 발전은 결국 판단 능력을 말하는 것일 뿐, 진리 혹은 사실인가에 관한 판단은 인지 영역의 소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인지적 한계는 지금은 비판 혹은 보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활용의 대상이다. 가상과 실제의 문제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진리와 거짓의 문제로 다루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가상 세계는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고, 우리의 현실에 존재하는 중요한 기표로 자리 잡고 있다. 유해영의 다음 언급을 보자. 

 현실의 맥락과 연결해서 가상현실 콘텐츠를 경험하게 되면 실재감과 현장감이 극대화되는데, 현실에서는 한정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가상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공간을 바꿔 경험의 세계를 확정할 수 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환상을 실제처럼 경험하며 극적으로 체험할 수 있고, 무미건조한 현실에 가상 세계를 도입하면 흥미롭고 놀라운 경험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유해영, 2018, p.ix)

윗글에서 보듯이, 인간의 인지는 진리를 판별하지 않는다. 인간의 생활공간은 가상현실이 만드는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공간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완벽하지 않다는 전제에서 구축된다. 가상현실 콘텐츠는 실제가 아니라는 전제에서 시작하며, 그 우수성은 실재'감', 현장'감'을 '높이면' 되는 정도의 문제로 판별된다. 

 4차 산업 혁명 후에 포스트휴먼으로서 우리의 이성이 감지해야 하는 진리는 만들어진 진리, 다시 말해 가짜 뉴스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가 모두 경험할 수 없는 사회의 변동들은 모두 재현을 통해 경험할 수밖에 없다. 이 재현은 언제든지 조작될 수 있고, 이 조작된 재현들을 바로 잡는 것은 포스트휴먼으로서의 이성을 재규정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이는 사회 성원들의 협력적 지식 확장, 미디어와 가상현실에 바탕을 둔 인지 확장이 인공지능과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방식과 방향의 근저에는 너무나 흔하지만 소중한 우리의 자산, 창의성과 상상력이 자리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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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 국사편찬위원회의 글은 텍스트가 미지에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인지 확장에 기여할 수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진리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조선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조선인은 흰옷 입기를 좋아하였다. 이에 관해 긍정과 부정의 입장이 외국인의 시선에 혼재되어 나타난다. 언더우드는 조선인의 의생활에 관해 “더ㅅ럽고 흰 토속 옷이다. 가난한 하층 국민의 경우 한 달에 두 번 이상 옷을 갈아입는 적이 없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불결함’의 강조는 “조선 사람들은 목욕을 싫어하기 때문에 침례식(浸禮式)에 참석하지 않았다. 침례교는 결국 조선을 떠나 목욕을 잘 하는 일본으로 들어갔다.” 등과 같은 표현에서 보듯이 반복되어 설명되었다. 그렇지만 흰옷에 관해 다른 인상기도 존재한다. 게일은 “한국인은 깨끗한 의복을 입는다. …… 일본 사람들처럼 목욕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의복으로 자주 갈아입는다.”라고 평가하였다. 그런데도 조선에 관한 스테레오 타입의 논의가 존재하였고, 그 기준은 ‘문명과 야만’의 잣대였다." (국사편찬위원회, 2009, pp.279-280)  

(이 글은 졸고, 「포스트휴먼과 지능 담론(1)」,다문화콘텐츠연구34호, 2020, pp.261-290에서 발췌하였습니다.)

휘택(중앙대학교 유럽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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