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Terrace at Night - 이수진 필자는 2018년 A.I. Atelier라는 AI 도구로 작품 전시 및 기획을 했다. 작품은 세 개 카테고리로 구성했다. 빈센트 반고흐, 외젠느 앗제 그리고 장 프랑수와 밀레다. 잘 알려진 예술가들의 작품과 필자가 작업한 사진을 재료로, 그리고 컴퓨터 시스템을 새로운 붓으로 작품을 만들고 쇼케이스를 열었다. 그림과 사진이 표상하는 예술가들의 시대를 읽고 사진이 표상하는 동시대의 도시 공간을 기술 도구로 엮어 시간을 넘어서고자 했다. 사진기술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게 했다면 인공지능 기술이 예술가의 정신세계를 영원히 재현할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작품은 인사동 한복판 미술세계라는 공간에 전시, 전통적인 예술 작품 표현 문법에 따라 대중과 만났다. AI 시대에 고전의 전시 방식을 기획한 이유는 예술의 장(場)에 한껏 뽐내야지만 대중이 예술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예술작품이 되기 위한 여정은 멀고도 험하다. 이 여정에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식이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직 고전 전시 방식, 즉 관람의 형태다. (작품과 대중이 만나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 중 관람형태를 고전적인 전시 방식이라고 명명한 것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음을 밝힌다.) 이수진 작가가 인사동에 연 전시. 왼쪽부터 밀레에 대한 경의, 반 고흐에 대한 경의, 쇼케이스
필자는 사진으로 도시를 표상하는 연구를 시작으로 컴퓨터 비전 기술을 이용해 실재 세계를 변형된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AI 기술을 만나 시대를 뛰어 넘는 이미지 재료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대가들의 시각적인 표현 양식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선택한 색채, 형상 그리고 시대적 배경을 연구하고 모사하는 것이다.
A.I. Atelier는 인간의 시각 처리 과정과 인간의 뇌가 생각하는 구조를 학습한 딥러닝 기술로 인공지능연구원(AIRI)에 의해 탄생했다. 스타일 트랜스퍼(Style Transfer) 알고리즘을 응용한 도구로, 기존의 수많은 이미지를 학습한 컴퓨터가 특정한 화풍을 자유자재로 선택하고 입힐 수 있다. 또 인터넷 공간에 떠도는 수많은 이미지를 오브젝트로 선택할 수 있고, 그 오브젝트를 자유롭게 재배치하고 생성하기도 한다. 이미 현존하는 이미지와 화풍이 물감과 같은 재료가 되고 붓과 같은 도구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한계를 점차 뛰어 넘는 기술을 만나고 있다. AI 기술을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굉장히 빠른 속도로 계산해 내는 기계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 수집은 물론, 계산 방식 알고리즘 구조화도 인간의 몫이다. 그런데 우리는 말한다. “기계가 예술을 창작해 냈어!” 라고.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스마트폰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일상처럼 사진을 만나는 시대다. 스마트폰은 사진기라고 명명하기 지나칠 정도로 간편하게 사진을 만들어낸다. 우리 일상에 수족과 같은 이 기계는 손 안의 작은 컴퓨터다. 컴퓨터에 부착된 카메라 버튼을 누르면 카메라 렌즈를 통해 빛이 들어오면서 이미지를 아주 작은 칩에 저장한다. 필름 사진기, 디지털 카메라를 거쳐 등장한 스마트폰은 사진 찍는 행위를 간편화했다. 사진 편집 작업도 어도비 포토샵에서 나아가 인공지능으로 화풍과 같은 작품 특징을 사진에 가미할 수 있게 됐다. Entrance Hall
of Saint-Paul Hospital - 이수진 사진은 1826년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Joseph Nicéphore Niépce)에 의해 탄생했다. 당시에는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실재하는 대상의 완벽한 ‘재현’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후 사진은 기술적 진보와 더불어 삶의 보편적인 표현 양식으로 진화했다. 당장 우리의 수족인 스마트폰을 통해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1935년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이라는 소논문을 통해 독일의 평론가 발터 벤야민은 사진 매체에 환호했다. 그가 실재하는 대상을 재현하는 사진이란 기술에 매료된 이유는 여러 맥락에서 짚어 볼 수 있다. 그 중 필자가 가장 주목한 건 전통 예술 작품의 미묘한 고유성을 의미하는 ‘아우라’가 사라졌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아우라’의 소멸은 광범위한 재현을 통한 새로운 ‘대중’ 예술의 가능성을 열었다. 85년이 지난 지금 사진은 소통 수단으로서 문자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 (다른 맥락에서, 예술로서의 사진은 다시 아우라를 쓰고 예술 시장으로 들어갔다.) 인간의 정신세계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 가시화하는 작업이 시각 예술이다.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이 있고 필자는 그 매체로 사진을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붓이나 펜에는 능숙하지 않은 반면, 기계는 친숙했고 잘 다루기도 했다. 또 ‘완벽한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렌즈를 통해 세상을 담아내고 현상과 인화 과정을 통해 이미지를 정착하는 과정이 더욱 정직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정직성은 결국, 생산 과정에서의 일정한 문법에 근거하는 것이다. 문법이 있다는 건 이해하기만 하면 틀리는 일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법의 정확성은 기술의 정확도에 따라 확정된다. 사진기라는 기계로 만들어 놓은 사진 이미지는 재현의 순간을 정확하게 복제할 수 있다. 발터 벤야민은 유일무이한 현존성이 아우라를 만들고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150년이 지난 현재는 그 아우라를 만들기 위해 사진의 에디션을 정한다.) 발터 벤야민이 살아 있다면 A.I. Atelier야말로 예술이 가지는 ‘아우라’를 진정으로 없앤 도구라고 칭하지 않을까 상상한다. 누구나 이 도구를 사용하면 수많은 이미지 컨텐츠, 스타일을 복제할 수 있다. 하지만 마냥 과정이 단순하진 않다. 기계는 생각을 하는 주체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알고리즘에 따라 연산 과정을 거쳐 마치 기계가 생각을 한 것처럼 복제한 이미지들을 재해석 하는 것이다. 이상하지만 또 정직하게 유일무이의 현존성을 갖되 아우라는 없다. A.I. Atelier를 이용해 작품을 만들 때에도 역시 예술을 위해 심연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고통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예술 영역에 진입하는 지금, 사람들은 걱정한다. 이제 인간의 정신 영역까지 지배당하는 것인가? 필자는 그 반대를 말하고 싶다. AI로 인해 예술 표현을 위한 물리적 행위와 시간은 뒤로 하고, 인간은 더 폭넓고 깊이 있는 고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타인의 화풍을 재료로 삼은 것일까. 우리는 모두 표현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이 B.C. 15000년 그려진 것을 상기해 볼 때 이 욕망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필자는 우리에게 익숙하거나 혹은 매료된 스타일을 모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욕망이 인간의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의 욕망이 A.I. Atelier로 AI 시대 예술 작품을 만들었다. 왼쪽부터 Oleander, Almond Blossom 기술과 예술은 대척점에 있는 듯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바로 무한한 창의력이다. 인공지능 기술이 인간의 정신 세계를 탐하고 인간을 대신해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예술이 예술일 수 있도록, 인간의 고유 영역을 더욱 굳건하게 해 주는 것이다. 기술은 유용하게 쓰이면 된다. 기술은 인간이 인간의 편의성을 위해 만들어진다. 그런 기술의 기능은 순수하다. 그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것은 기술이 아닌 인간이 아닐까?
이수진, 중앙대학교 연구교수
AI타임스에 2020년 11월 5일에 실린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