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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현전의 시대에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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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4 15:16


  2020년, 우리 모두의 삶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가 이전에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했고, 또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세계를 경험했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이러한 경험이 일회적이지 않을 것이라는데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결코 코로나19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데 있다. ‘포스트-코로나’ 또는 ‘위드-코로나’가 이야기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2020년 초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했을 때, 나는 이 상황이 이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다. 막연히 곧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전문가들이 암울한 전망들을 이야기할 때도, 나는 속으로 ‘설마’했었다. 바이러스에 대해 그토록 비과학적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생각은 비과학적 사유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눈앞의 현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이를 단순하게 부인하려고 했던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아마도 출발점이 아니었다 싶다. 그러나 현실은 극적으로 변화했다. 아니, 변화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혁명’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코로나 이후’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은 거의 혁명적이다. 이러한 혁명적 변화 속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은 ‘거리두기’와 ‘비대면’이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이 둘은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우리가 현실공간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대표하는 말이다. 그 살아가는 방식이 바로 ‘원격현전(telepresence)이다.  

  원격현전은 말 그대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마치—처럼(as if)’가 잘 작동되어야 한다. ‘마치 현실처럼’,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마치 진짜 사람처럼’, ‘마치 실제 강의실인 것처럼’, ‘마치 진짜 운동하는 것처럼’말이다. 멀리 있는 것들을 가까이에서 지각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멀리 있기에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려는 인간의 욕구는 망원경(telescope)와 텔레비전(television)을 발명했고, 멀리서도 듣기 위해 텔레폰(telephone)을 발명했다. 디지털 매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원격현전이라는 새로운 존재방식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이전에도 원격현전에 대한 열망은 이미 존재했다. 여기와 저기라는 공간적 거리가 없어지고, 공간적 거리와는 무관하게 ‘지금’이라는 시간 현재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미 존재했었던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상상하기도 했으며, 또 보통 사람들도 이러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과학기술적 장치들을 상상하기도 했다. 상상만으로 존재했던 원격현전은 이제 실제로 가능한 존재방식이 되었고, 또 일상적인 존재방식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큰 변화 중 하나다.  

  디지털 시대에 새로운 존재방식으로 등장한 원격현전은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현실공간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야만 하고, 그 대신 우리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비대면 만남’을 해야만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커뮤니케이션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와서 ‘거리두기’를 해야만 살 수 있다고 한다. 심지어 한 공간에서 살고 있는 가족 간에도 ‘거리두기’를 해야만 한다. 덕분에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말이다. 어쨋든 ‘비대면’이라는 말도 매우 생소하지만, 이제 매우 일상적인 언어가 되었다. 매체에서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대면적(face to face) 소통’이었다. 직접 대면적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 매체를 활용해 또 다른 대면적 소통체계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 경우 비대면적이지만, 대면적인 것과 별 차이가 없는 소통체계가 마련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비대면적인 것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들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원격현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한 마디로 ‘원격현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원격현전 시대는 역설적으로 현전에 대한 재평가를 가져왔다.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된 교육 현장에서 학교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가 한 예가 될 수 있다. 원격현전이 현전과 잘 구별되지 않는다 해도, 이는 ‘매체적 현전’이다. 매체적 현전은 그것이 아무리 현전과 구별하기 어렵다 해도  ‘유사-현전(pseudo-presence)’인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현전은 아니다. 유사-현전은 현전 효과를 극대화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때인가 원격현전이 현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좀 더 뒤에 올 줄 알았다. 내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이러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갑자기 비대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삶에 등장한 원격현전 사회. 우리는 이제 이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코로나19 펜데믹이 종식(?)된다고 해도, 많은 부분들은 비대면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원격현전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또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문화, 일상생활, 종교, 교육 심지어 사적인 인간관계도 이미 원격현전을 기반으로 변화했으며, 또 이를 경험했다. 이와 더불어 현실공간에서의 현전에 대한 사유도 요청된다. 현전과 원격현전으로 혼종화된 사회에서 이제 우리는 포스트 휴먼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포스트 휴먼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특히 휴먼적인 것에 여전히 집착하는 사람들에게는 말이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도 근원적인 혼란과 더불어 살아가야 될 것이다.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중심으로 한 비대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현실의 나에게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거침없이 소개되고 있다. ‘확진자 00번’으로 명명된 그 누군가의 삶이 나에게 소개되는 것이다. 내가 평소에 알고 있던 사람들과는 거리두기를 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알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한 정보도 스스로 흘리고 다닌다. 정보를 남기면서, 남겨진 정보들이 후에 제대로 파기될지 의심한다. 그러나 대책은 없다. 이런 모든 공간에 남겨진 정보의 흔적들은 원격현전 시대에서 ‘원격감시(telepanopicon)’을 위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 또한 그저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원격현전 시대에서 살아가기란 여러모로 매우 어렵다.

심혜련 (인공지능인문학 HK+사업단 공동연구원,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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