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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해져 가는 가상과 현실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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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7 12:23

- 퓨전 게임판타지 웹소설과 VR·AR 기술의 발달 -
 

 

 2000년대 <달빛조각사>라는 가상현실 게임 소재의 인터넷 소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후 <달빛조각사>는 ‘게임 판타지 소설’이라는 장르 유형의 정립을 이끌었다. <달빛조각사>와 같은 게임 판타지 소설은 MMORPG가 성행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 MMORPG의 양식을 소설에 재현하여 독자들에게 게임과 소설의 재미를 모두 충족시켜주었다. 이러한 게임 판타지 소설에서 가상현실 게임과 실제 현실은 이원화된 공간으로 형상화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주인공은 현실에서는 보잘것없을지라도 ‘게임 잘하는 능력(게임 숙련도)’을 통해서 정직한 보상을 받고 불합리한 현실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2010년대 중후반부터 게임 판타지 소설 장르는 다른 장르 소설과 결합되면서 퓨전화되었다. ‘게임 빙의물’, ‘헌터물(또는 레이드물)’, ‘아포칼립스물’, ‘성좌물’ 등으로 불리는 퓨전 게임 판타지 장르가 활성화된 것이다. 이러한 웹소설은 대체로 현실과 게임의 가상공간을 이원화하지 않는다. 게임이 곧 현실이고 현실이 곧 게임인 일원화된 공간을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스마트폰의 발달로 인한 게임 환경의 변화와 관련된다. 스마트폰의 발달은 온라인에서 모바일로 게임 환경을 변화시켰다. 컴퓨터 앞에 앉아야만 즐길 수 있던 MMORPG에 비해서 모바일 게임은 대중들이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었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통해 숙련도를 높여야 했던 MMORPG와 달리 모바일 게임은 ‘현금 결제’로 그 시간과 노력을 대체할 수 있었다. 즉 게임이라는 가상세계와 실제 현실의 이분법이 무의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상과 현실의 관계 변화는 또한 오큘러스 리프트, 바이브 등 VR(가상현실)기기의 상용화, 포켓몬고와 같은 AR(증강현실) 게임의 성공과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VR, AR 게임 이전의 온라인게임은 컴퓨터 기술을 토대로 현실과 별개의 가상공간을 만들었다. 가상(게임)과 현실은 컴퓨터를 통해 온라인으로 접속해야만 연결되는 이원화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VR과 AR 게임의 상용화는 이원화되었던 가상과 현실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VR 게임은 컴퓨터 기술과 VR기기를 통해 가상(게임)과 현실을 연결한다는 점에서는 기존의 온라인게임의 이원화된 공간과 유사한 공간을 구현한다고도 볼 수 있지만, 게이머에게 더 많은 감각과 집중을 동원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게이머에게 게임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따라서 VR 게임은 게이머가 가상의 세계에 몰입하여 현실과의 단절을 경험하도록 한다. AR 게임은 게임을 현실 위에 덧씌우고, 게임과 현실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리거나 희미하게 만든다. 가상의 게임이 현실의 물리적 공간에서 플레이되고, 가상세계를 위해 현실이 동원되는 것이다.

  VR, AR 게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가상과 현실의 관계 변화는 퓨전 게임 판타지 장르가 현실과 단절된 가상의 공간을 구현하거나, 가상과 현실이 겹쳐진 세계를 구현하는 것과 관련된다. VR 게임은 ‘게임 빙의물’이라고 불리는 하위 장르와, AR 게임은 ‘헌터물’, ‘아포칼리스물’, ‘성좌물’ 등의 하위 장르와 연결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게임 빙의물’은 고인물 게이머가 자신이 하던 게임의 세계에 소환되어 사전 지식을 통해 모험하는 장르로서 VR 게임과 같이 현실과 단절된 가상의 공간을 구현한다. ‘헌터물’, ‘아포칼립스물’, ‘성좌물’ 등으로 불리는 웹소설은 몬스터와 던전이 출몰하거나 게임 시스템이 현실에 덧씌워져서 세계의 멸망이나 대재앙이 일어난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서사를 전개한다. AR 게임처럼 가상(게임)이 현실에 겹쳐진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 설정을 기반으로 웹소설은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 비인간에서 벗어난 존재 등 포스트휴먼을 대중적으로 상상하고 있다. 

  퓨전 게임 판타지의 공간은 미래사회의 일면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공간은 (작가가 의도했든 아니든) VR과 AR 기술의 발달로 야기될 수 있는 미래사회의 문제 상황이 대중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상과 현실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운 VR과 AR 기술의 발달은 말 그대로 인간이 가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문제 상황에 봉착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실제로 VR과 AR 게임이 상용화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대두되기도 하였다. AR 게임인 ‘포켓몬고’ 출시 후 148일간 ‘포켓스탑’ 부근에서 운전하면서 게임을 한 사람들로 인해 미국 전역에서 사용된 경제학적 비용은 20억~73억달러(약 2조~7조8000억원)에 달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하였고, VR 게임으로 인해 사망사고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문제들은 VR과 AR 기술의 발달이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아직 VR 게임은 기기를 착용한 눈과 귀가 인식하는 가상세계와 플레이어의 신체가 감지하는 현실 환경의 어긋남 때문에 사이버 멀미라고도 불리는 어지러움이나 울렁거림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사이버 멀미는 가상현실을 가상현실로 인식하게 하는 닻과 같은 존재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사이버 멀미는 결국 VR-AR 기술의 발달로 해소될 것이다. 이는 VR, AR 기술이 가상세계의 감각적 몰입도를 높이는 ‘텔레프레즌스(Telepresence)’에 주목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텔레프레즌스’는 커뮤니케이션 연구에서 먼저 주목한 개념으로, ‘현상체가 현실 세계를 떠나 가상세계로 이동함에 따라 가상세계의 사물과 인물에 대해 마치 현실 세계의 사물과 인물에 대해 반응하는 것과 유사한 심리적, 행동적 반응을 보이는 현상’으로 정의된 바 있다. 이러한 텔레프레즌스 현상은 가상세계의 감각적 몰입도가 높을수록, 가상세계의 감각적·인지적 충실도가 뛰어날수록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VR, AR 기술이 텔레프레즌스에 주목한다는 것은 가상세계의 감각적 몰입도, 감각적·인지적 충실도를 높인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2021년 VR, AR 기술과 관련하여 ‘메타버스(Metaverse)’라는 개념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사전적으로 메타버스는 “웹상에서 아바타를 이용하여 사회, 경제, 문화적 활동을 하는 따위처럼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이르는 말”로 정의된다. 디지털 게임이나 퓨전 게임 판타지 소설 등에서 서사적 상상력으로 구현되던 가상과 현실의 일원화된 세계가 일상 현실로 그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오늘날 상황은 웹소설에서 그려내는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 즉 포스트휴먼 담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요구하고 있다. 

강우규 (중앙대학교 인문콘텐츠연구소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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